등록 : 2019.12.10 08:00
수정 : 2019.12.1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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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 목간의 적외선 촬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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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나무 표면 다듬은 육면에
94자 추정되는 한자 고루 적어
남한 출토 역대목간 중 가장 커
골짜기‘곡’ 논‘답’ 둑 ‘제’기록
경산 인근 마을 저수지, 논 조성 정황
조세 징수용 땅 면적 단위로
‘결’‘부’ 쓴 것도 확인
통일 전 신라 국가경영 기초 다진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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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 목간의 적외선 촬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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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겨레>가 출토 사실을 단독 보도(6일치 18면)하면서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경북 경산 소월리 신라 촌락 유적의 나무쪽 문서(목간)가 1500여년 만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전문가들의 판독 결과, 이 유물은 6세기 신라 관리들이 경산 일대 촌락의 저수지와 농토를 관리해온 상황과 세금을 매기는 단위 면적 등을 기록한 촌락 행정 문서였다. 길이 70㎝가 넘는 길쭉한 나무쪽을 여섯 면으로 각지게 다듬어 각 면에 총 90자 이상을 빼곡하게 새긴 이 목간은 지금까지 남한에서 출토된 고대 목간 중 가장 크며, 시기도 가장 오래됐을 가능성이 큰 희귀기록물로 밝혀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9일 이런 판독 결과와 함께 길이 74.2㎝의 목간 사진을 공개했다. 목간은 화랑문화재연구원이 최근 발굴·공개해 큰 화제를 모은 5세기 삼면 얼굴 모양 토기 출토 지점 바로 아래쪽에서 발견됐다. 발굴 즉시 경주연구소로 옮겨져 지난 6일 한국목간학회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와 윤선태(동국대)·이수훈(부산대)·김재홍(국민대) 교수의 1차 판독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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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외선 사진으로 포착한 출토 목간 에이(A)면의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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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된 목간은 굽은 나무의 표면을 다듬어 각진 여섯 면을 만들고 모두 합쳐 94자로 추정되는 한자를 적었다. 해서체의 서체나 내용으로 보아 경산 인근 토지 현황을 기록한 6세기 무렵 공문서의 성격인데, 6면 가운데 2면은 글자를 연습한 습자 흔적으로 보인다. 기존 국내 목간보다 훨씬 커 발굴 당시엔 대형 나무쪽 문서인 목독으로 보는 견해가 나왔다. 하지만 모양새로 미뤄 관의 권위를 드러내는 대형 시각(視覺) 목간으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대세였다.
목간의 첫 면인 에이(A)면에는 ‘□부감말곡답칠(?)□제상일결 구미곡삼결 제하□부’(負甘末谷畓七(?)□堤上一結 仇彌谷三結 堤下□負)라는 글자가 보이며, 다른 면에도 논을 뜻하는 답(畓), 밭을 뜻하는 전(田) 등이 숫자와 함께 보인다. 학자들은 판독 글자 가운데 골짜기를 뜻하는 ‘곡’(谷)과 답(畓), 둑을 뜻하는 ‘제’(堤)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골짜기에 형성된 일정한 신라인의 촌락 집단을 ‘곡’이라 칭했으며, 둑(堤)이 조세 부과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처음 밝혀졌기 때문이다. 골짜기와 둑을 중심으로 당시 지방 촌락이 형성되고, 계곡에 제방을 쌓은 뒤 물길을 빼 논을 만들어 고유 면적 단위인 ‘결’(結)이나 ‘부’(負)를 매겨 조세를 거둔 신라 중앙정부의 지배 양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윤선태 교수는 “6세기 초 고신라 시대 이미 지방 곳곳에 중앙정부가 토목기술을 동원해 제방을 쌓고 농토를 조성했고, 이를 측량해 세금 징수 기반까지 마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통일 이전에 신라가 국가 경영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증”이라고 짚었다.
고대 한반도에서 창안된 고유 한자인 논 답(畓) 자를 목간에 썼다는 점, 조세를 매기기 위한 농지 면적 단위로 결이나 부를 이미 쓰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은 큰 성과다. 그간 학계에선 답(畓)은 경남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561년 건립)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간주했다. 소월리 출토 목간에 ‘답’이 적혀 있어 제작연대를 그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주보돈 교수는 “이 목간은 신라 목간을 대표해온 경주 월성 해자 출토 목간의 연대인 580년대보다 이른 시점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는 물론 남한 출토 고대 목간 중 가장 이른 유물일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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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 목간의 컬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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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리 유적 수혈 구덩이에서 문자가 적힌 다면목간을 발굴할 당시의 현장 작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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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結)과 ‘부’(負)의 두 단위 한자도 지금까지 삼국 통일 뒤부터 쓴 것으로 봤지만, 이 목간을 통해 6세기께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됐다. 7세기 통일 직후의 신라 촌락문서(일본 쇼소인 소장)에 나오는 지방 촌락 경제의 국가 지배 방식이 한 세기 전 이미 충실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연구소 쪽은 자연과학적 분석도 병행해 추가 판독 성과와 세부 분석 내용을 지속적으로 공개할 방침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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