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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8 09:00 수정 : 2019.11.28 19:30

교동 62호분에서 나온 등잔 모양 가야토기

오늘 창녕 교동 63호 대형고분 무덤방 개봉
내시경 확인 결과 도굴흔적 없어
부장된 토기류들 정연하게 들어차
부근 62호분에선 독창적 디자인의 등잔형 주전자형 토기 출토

교동 62호분에서 나온 등잔 모양 가야토기

교동 62호분에서 나온 주전자 모양 가야토기

오늘 개봉될 63호분의 모습. 주검공간인 석곽 위로 7개의 덮개돌을 놓았다. 개봉 과정에서는 2개의 돌을 제거해 주검공간을 들여다보고 조사하게 된다.

100년 전 일본인들이 팠을 때처럼 막대한 보화들이 쏟아져나올까.

4~5세기 가야시대 소국 비화가야의 땅이었던 경남 창녕의 교동고분군에서 내부가 도굴되지 않은 당대권력자의 큰 무덤이 해방 뒤 처음으로 확인됐다. 교동고분군은 일제강점 초기인 1918~1919년 일본 학자 야스이 세이이쓰가 도굴에 가까운 조사를 벌여 금동관 조각, 금제귀고리, 장식대도, 목긴 토기(장경호) 등 화차 2량 분량의 유물들을 빼돌렸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창녕읍 교리 산 5번지 일대의 교동, 송현동 고분군(국가사적) 일대를 최근 학술발굴한 결과 고분군 일부인 63호분이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대형 무덤으로 파악됐다고 28일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연구소는 이날 오전 무덤 묘실 석곽 윗부분의 덮개돌(개석)을 들어내고 내부 무덤방의 부장품과 주검을 안치한 자리 등을 살피는 탐색 조사 과정을 언론과 학계 전문가들에게 전면 공개할 예정이다.

조사된 비화가야인의 무덤들은 고분군 동쪽 상단 부분에 있는 4기다. 큰 봉토무덤인 39호분(봉토 지름 27.5m)을 중심으로, 역시 대형무덤에 해당하는 63호분(봉토 지름 21m)이 인접하고, 소형분인 38호분(봉토지름 8m), 62호분도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무덤들을 만든 연대는 대체로 5세기 중후반께로 보고있다.

연구소 쪽이 덮개돌 개봉에 앞서 내시경으로 살펴본 63호분 무덤 내부. 정연하게 아귀를 맞춰 조성한 무덤방의 돌벽과 흙층과 함께 뒤섞인 토기들의 무더기가 보인다.

미도굴분으로 처음 존재가 알려지게 된 63호분은 봉토가 바로 위쪽에 있는 39호분의 큰 봉토에 가려져 있는 모양새다. 이런 지형 덕분에 쉽게 노출되지 않아 후대 도굴을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 내용을 보면, 내부 주검 공간을 덮은 뚜껑돌은 길이 2m 크기의 편평한 돌 7개를 석곽 위에 올린 뒤, 사이에 점질토를 촘촘하게 발라 밀봉한 것으로 드러났다. 내시경으로 들여다본 결과, 석곽의 주검 자리 공간 안에는 주검과 토기 등의 껴묻거리(부장품)를 묻은 내부 모습이 옛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봉토의 표면 등에는 점토덩어리를 바른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고, 호석이 노출된 모습도 잘 드러나 당시 비화가야인의 장송의례와 고분 축조기술을 여실히 보여준다.

39호분은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에서 세 번째로 큰 고분으로, 고분군 가장 높은 지점에 자리한다. 빗물에 따른 무너짐을 막기위해 중심부는 점토로, 가장자리는 흙으로 쌓았다. 봉분을 쌓는 단계마다 점토를 깐 것은 울산 약사리유적 같은 고대 제방터에서 드러나는 공법이다. 또, 봉토 주위에서는 남동쪽 호석에 잇닿게 약 2m 간격으로 큰 항아리를 놓은 자취도 발견됐다. 한쪽에만 집중적으로 의례용 토기를 놓는 고대 제례 행위의 흔적들인데, 최근 경주 쪽샘 44호분에서도 거의 똑같은 자취가 파악된 바 있다.

이번에 조사된 교동고분군의 무덤들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위 가운데 가장 큰 고분이 39호분이고 그 아래로 왼쪽부터 62호, 38호, 63호분의 자취가 보인다. 63호분은 39호분의 봉토가 후대 쓸려내려와 윤곽이 자연스럽게 묻히면서 도굴꾼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무덤 안 얼개의 경우 내부 석곽의 동서 장벽과 남단벽에 약 1.5m 길이의 큰 돌을 세웠고, 북단벽에는 돌을 눕혀서 주검자리를 둘러싼 네 벽을 만든 점이 주목된다. 유사한 내부 축조 구조가 경북 성주 성산동고분군 같은 대구·경북지역 일부 고분과 일본 나가노, 규슈지역의 고분 등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연구소 쪽은 “비화가야와 주변국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실물자료”라고 분석했다.

출토된 유물들 가운데는 62호분에서 나온 등잔 모양, 주전자 모양의 상형토기들이 발군의 작품으로 꼽힌다.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 400여 점 가운데 일부로, 등잔형 토기의 경우 수화기 모양의 몸체 양쪽에 잔모양이 달린 토기와 6개의 잔이 달린 두 종류가 나왔다. 이런 상형토기는 주로 가야권 신라권 지역에서 드문드문 출토되는 고급유물인데, 수화기 모양의 잔모양 토기는 창녕에서 처음 나온 독창적 디자인의 용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큰 토기 안에 작은 토기를 넣고, 같은 종류의 토기를 위아래로 포개거나 열을 지어 놓는 등의 다양한 매납 방식도 확인되었다.

62호분에서 여러개 등잔이 얹힌 상형토기가 큰 토기 항아리 안에 든채로 출토되는 모습.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는 약 250여 기의 가야시대 고분이 흩어져 있다. 연구소는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의 묘역인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미정비지역(목마산성의 남서편 구릉부분)에 대한 학술발굴조사를 2014년부터 추진해왔다. 2014년~15년에는 5세기 중반께의 봉토분 9기, 석곽묘 15기를 발굴조사해 벽에 나무기둥을 세워 축조하는 방식, 봉토를 연접하는 방식 등을 확인한 바 있다.

최근 현 정부의 국정과제인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사업‘에 포함돼 고분군에 대한 연구조사는 탄력을 받고있는 상황이다. 연구소 쪽은 “조사에서 확인된 최고 지배자 무덤의 축조기법과 장송의례 흔적, 출토유물 등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를 빚어낸 비화가야의 성격을 이해하는 단서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연구소 쪽은 이날 오전 63호분의 덮개돌을 들어올리고 무덤 안을 조사하는 작업을 언론에 공개하는데 이어 오후 3시부터는 일반인들에게도 현장을 내보이기로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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