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30 14:29
수정 : 2019.10.3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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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가야리 유적 토성벽 단면에 대해 연구소 쪽이 만든 설명사진. 붉은색 선이 성을 쌓기 위해 놓은 횡장목. 파란색 원은 목책렬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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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가야리 판축토성 조사결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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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가야리 유적 토성벽 단면에 대해 연구소 쪽이 만든 설명사진. 붉은색 선이 성을 쌓기 위해 놓은 횡장목. 파란색 원은 목책렬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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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인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지킬 성벽을 어떻게 쌓았을까. `풍납토성‘을 쌓은 백제인들, `명활산성’을 쌓은 신라인들과는 기술이 달랐을까.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물증이 나왔다. 1600~1500년전 경남 함안군 일대에서 번성했던 아라가야의 왕성터로 유력하게 지목되는 군내 가야리 289번지 일원의 성터(국가사적)에서다. 이 성터 유적 단면을 심층조사해온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아라가야인들의 독특한 판축성벽 쌓기 방식을 보여주는 여러 흔적들을 처음 확인했다고 30일 발표했다.
연구소가 밝힌 조사결과를 보면, 아라가야인들의 성벽 쌓기는 나무틀을 짜서 흙을 구획하고, 달구질로 흙층을 다져 성벽을 쌓은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토성벽 안에서 중심이 되는 토루(지표상에 돌출된 흙덩어리) 구간을 중심으로 나무기둥과 가로방향으로 고정시킨 목재(횡장목) 등 판축성벽의 흙층을 구획하는 목조 구조물이 늘어서 땅을 구획하고, 땅을 다지는 달구질을 벌인 흔적 등이 확인됐다. 나무기둥(영정주)은 중심 토루 내 외곽의 성벽 기초부분에 약 60~80cm의 간격으로 열지어 설치됐고, 횡장목도 중심 토루 상부에 역시 약 60~80cm의 간격으로 놓여진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중심토루에서 흙층을 만드는 방법이 확연히 차이나는 지점이 확인돼 성벽을 구간별로 나누어 쌓은 것도 알 수 있었다. 구획된 성토층 윤곽선의 바로 서쪽에서는 찰기가 높고 입자가 고운 진흙을 달고로 두드려 다진 직경 8~10cm의 흔적까지 관찰됐다.
이런 달구질 흔적은 영정주와 횡장목으로 구성된 목조 가구를 활용한 판축공법이 아라가야 왕성의 축조 당시 널리 쓰였음을 알려주는 근거다. 토성벽을 축조하는 공정마다 영정주와 횡장목으로 구성된 목조 가구를 설치해 구획을 나누고, 나뉘어진 구획의 흙 위에 성토다짐 작업인 달구질을 하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정교한 공정에 따라 이루어진 양상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연구소 쪽은 “가야리 유적의 토성은 가야권역 안의 같은 시기 다른 유적과 비교할 때, 그동안 발견된 사례가 없는 독창적인 축조기법과 규모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현재 조사구역 안 토성의 전체 높이는 약 8.5m, 폭은 20m 내외이다. 축조기법의 양상과 출토 유물, 탄소연대 추정치 등을 감안하면, 아라가야 왕궁터의 추정 시기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볼 수 있다는게 연구소 쪽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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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가야리 유적의 횡장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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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리 일대는 옛부터 아라가야의 왕궁터로 계속 지목되었던 곳이다. 1587년 펴낸 읍지 <함주지(咸州誌)>와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보고 등에서 왕궁터로 추정됐고, ‘남문외고분군’, ‘선왕고분군’, ‘신읍(臣邑)’ 등의 왕궁 관련 지명이 실제로 전해져 왔다. 지난해부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토성벽, 목책, 건물터 등 다양한 왕성 관련 시설과 유물들이 드러나면서 실체가 드러나는 중이다. 이달 들어 유적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연구소는 31일 낮 1시 발굴현장에서 설명회를 연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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