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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왕조가 만든 중국의 대표적 석굴사원 윈강석굴의 16굴 본존상. 다른 석불과 달리 소매가 넓고 넓은 띠를 두른 중국풍 의상을 둘렀다. 460년 석굴을 처음 뚫은 북위 황제 문성제의 풍모를 담고 있다는 게 통설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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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북방 유적 기행 ③
‘왕이 곧 부처’ 윈강 대불 아래
‘백제의 선’ 물결치는 와당들
4~5세기 북위 첫 도읍 평성
‘왕=부처’ 사상 담긴 담요5굴
100년간 불상 5만개나 새겨
한반도 삼국 불교예술과 직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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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왕조가 만든 중국의 대표적 석굴사원 윈강석굴의 16굴 본존상. 다른 석불과 달리 소매가 넓고 넓은 띠를 두른 중국풍 의상을 둘렀다. 460년 석굴을 처음 뚫은 북위 황제 문성제의 풍모를 담고 있다는 게 통설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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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얼굴을 올려다보지 말라는 뜻일까.
높이 10m를 넘는 거대 석불 위의 천장에서는 티끌 섞인 흙먼지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다. 쿨럭거리면서 사람 키만한 발 부분부터 살폈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추켜올렸다. 세월의 풍상에 헤져버린 무릎과 허벅지, 배 부분은 자취를 찾기 힘들었다. 조금 더 고개를 들어올렸다. 넥타이를 맨 것처럼 가슴 부분에 도포의 각진 주름을 매고, 넓은 소매에 팔을 들어 세상의 번뇌를 포용하는 미남 부처상이 나타난다. 그는 인도인 싯다르타가 아닌 1600년 전 북중국의 황제였다.
■ 석굴에 어린 ‘왕즉불’ 사상
8월11일 여정을 시작한 답사단은 16일 막바지 일정으로 4~5세기 북위 왕조 첫 도읍인 평성(현 다퉁시)의 대표적 불교유적인 윈강(운강)석굴에 이르렀다. 먼저 돌아본 것은 석굴 중앙 부분의 다섯개 큰 석굴인 ‘담요 5굴’(16~20굴)의 시작인 16굴이었다.
16굴 본존상은 다른 석굴 부처와 달리 넓은 소매에 띠를 두른 중국풍 옷을 입은 것이 특징적이다. 답사 해설을 맡은 연구자 백다해(이화여대 고구려사 박사과정)씨는 “460년 석굴을 처음 뚫은 북위 황제 문성제의 풍모를 담고 있다는 게 통설”이라고 일러준다.
이 대불은 동아시아 청년의 모습이다. 인도 중앙아시아 양식을 답습하던 중국 불교 장인들이 본격적으로 중국 복식, 중국인 풍모의 대형 불상을 시도한 첫 사례다. 북위 왕조의 원류인 선비족 장인의 예술융합적 기질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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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강석굴을 대표하는 석불로 꼽히는 20굴 본존상. 윈강석굴은 황제가 곧 부처라는 국가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이 대불의 모델이 된 북위 황제가 누구인지는 학계의 오랜 논란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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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쫓겨 얼른 옆 석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리를 겹쳐 교각상의(엑스자 모양으로 앉은 것) 구도인 17굴, 협시보살들을 거느리듯 본존이 기립한 18굴, 불상 규모가 가장 큰 19굴, 윈강석굴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잘 알려진 20굴의 노출된 대형 삼존불을 차례로 훑었다. 한결같이 서역과 북방인, 중국인의 풍모가 뒤섞여 있다. 대불들은 원만한 인상이지만 좁은 수직 굴에 높이 솟은 거대한 규모의 조형감을 강조한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양감 탓에 권력자의 위세를 과시하는 듯하다. 18굴의 경우 주위에 여럿의 협시불을 거느린 대불의 조형감과 짜임새 있는 공간 구성이 제왕의 어전 같았다. 내부에 여러 개의 방을 거느린 19굴은 일종의 소궁궐로, 17m 넘는 불좌상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분명한 황제의 모습이다. 백다해씨는 “16굴부터 20굴까지 대불의 원래 모델이 누구인지는 20세기 초부터 계속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처음 불교를 수용한 도무제부터 굴을 조성한 문성제 등 대여섯명의 황제를 놓고 각 굴마다 비정하는 서로 다른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윈강석굴은 황제가 곧 부처라는 국가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중원에 들어온 이민족 왕조의 권력자들에게 서역의 포교승이 전해준 불교는 매혹적인 종교사상이었다. 이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세상 만물에 대한 부처의 자비와 포용을 강조했기에, 절묘한 통합의 통치이념으로 변용이 가능했다. 5세기 중엽 북위의 황제 문성제는 이런 배경에서 불교를 국가의 핵심적인 통치 종교 문화로 만들었다. 그는 부처로 격상된 선대 황제와 자신의 자태를 형상화해 거대한 실물로 남기길 원했다. 문성제의 치세인 화평 1년(460년)에 승려 담요가 주도해 선대 황제 5명의 자태를 모델로 이른바 담요 5굴을 뚫어 만든 것은 바로 그 결실이었고, 윈강석굴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46개의 크고 작은 석굴과 1200여개의 감실, 5만구 넘는 불상이 석굴 앞을 흐르는 무주천 주변 석벽에 계속 새겨졌다. 윈강석굴에서 처음 등장한 높이 10m이상의 대형불 조상이나, 다리를 겹친 미륵교각상의 모습은 황제가 곧 부처이자 미륵불이 되는, 북위 특유의 국가불교사상을 형상화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왕이 곧 부처라는 북위의 국가불교 사상은 글로벌한 영향력이 있었다. 곧 한반도 삼국에도 지배 이념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백제 성왕과 무왕, 신라의 진평왕 등은 전륜성왕의 화신 혹은 미륵불로 스스로를 일컬으며 숱한 불사를 일으켰다. 삼국은 황제불교, 국가불교를 형상화한 윈강의 불교미술까지 자연스럽게 수용했다. 윈강 석굴의 석불들은 북위의 정치와 종교예술이 고대 한반도와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수원지였음을 입증하는 조각유산이다. 현지 석불 중 상당수가 고대 한반도와 일본 불상들의 구도나 표정, 양감 등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담요 5굴 동쪽에 있는 1~15굴의 다채로운 석굴 도상들이 이를 여실히 짐작하게 한다. 특히 5, 6굴의 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가와 다보여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좌상’은 윈강석굴에서만 볼 수 있는 북위 미술 특유의 브랜드다. 신라인들은 이 도상을 탑 양식으로 재해석하는 독창성을 발휘해 불국사에 석가탑과 다보탑이란 걸작을 만들어냈다. 석굴 아래쪽 현대식 박물관에서도 신라, 백제와 연결되는 북위 불상의 미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눈에 와닿는 유물은 지난해 윈강석굴 서쪽에서 새로 출토된 석조불상의 통통하고 동그스름한 머리였다. 손에 잡힐듯한 명쾌한 양감과 동자승처럼 천진스런 표정 등에서
삼국시대 불상
특유의 표현 양식과 가깝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1992년 석굴 경내에서 발견된 북위시대 불두(불상머리)는 온화하고 후덕한 얼굴에 비친 미소
가 압권이었다. 그 미소를 주시해보니, 백제의 서산마애불이나 신라의 경주 일대 불상의 표정과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석굴은 2000년대 초반만해도 검은 석탄가루가 휘휘 날리는 광산촌 변방이었다. 최근 테마파크처럼 들머리를 단장해 상전벽해처럼 바뀌었다고 연구자들은 놀라워했다. 입구에 들어선 대형 상가와 호수 위에 띄운 불교사원 재현단지는 으리으리한 규모다. 정문엔 중국의 저명 조각가 우웨이산이 석굴의 개착자 담요를 재현한 큰 동상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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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윈강석굴 경내에서 발견된 북위시대 불두(불상 머리). 온화하고 후덕한 얼굴에 비친 미소는 백제, 신라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미소상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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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윈강 석굴 서쪽에서 새로 출토된 석조불상 머리. 손에 잡힐 듯 명쾌하게 다가오는 둥그스름한 덩이감과 동자승 같은 천진스런 표정 등에서 한반도 삼국시대 불상의 조형 양식과 연결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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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당 박물관의 기왓장에서 발견한 백제
이어 다퉁 시내에서 당대의 궁궐이자 하늘에 제사를 지낸 북조시대의 시설인 ‘명당’ 유적을 찾았다. 베이징의 명청대 제사당인 천단을 축소한 외관이다. 답사단은 뜻밖에도 건물 안에 자리한 북조예술박물관에서 색다른 유물들을 접했다. 소그드인의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석상은 주검의 관대나 다른 기물을 놓는 석판을 받치는 장식인데 요염한 무희상, 험상궂으나 익살스러운 동물상까지 다양한 요소를 곁들여 보는 재미를 주었다. 사람과 괴수의 얼굴 장식과 각기 다채로운 표정으로 생동하는 북위 무장상, 백제 사비시대의 와당과 직결되는 친근한 기와 유물들이 무더기로 있었다. 지하 전시실에서 유연하고 온화한 선이 물결치는 백제풍 와당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한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사는 “놀라운 발견”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백제 사비(부여)기 수막새 기와들의 원류로 그동안 한결같이 중국 장강 이남 남조 양나라 계통의 기와들만을 꼽았지요. 그런데 그런 양식의 기와들이 북방 북조의 다퉁에도 다 있네요. 사악한 기운을 쫓는 용도로 그려진 사람얼굴이나 괴수무늬, 단엽형의 연꽃무늬 등이 있는 와당들이 무더기로 보이네요. 백제 특유의 유연하고 온화한 선의 원류가 북조 기와에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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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시대 백제 와당 전돌의 연화문 장식과 흡사한 북위 유적 출토 기와 전돌 무늬 장식. 다퉁박물관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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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서도 놓지 않는 절대권력의 무대 영고릉
명당을 돌아본 뒤 일행은 여러대의 승합차에 나눠 타고 다퉁 시 외곽으로 나갔다. 5세기 북위 황제 효문제(재위 471~499)를 섭정하며 죽을 때까지 국정을 주물렀던 여걸 문명태후 풍씨(442~490)의 무덤인 방산 영고릉으로 가는 길이다. 다퉁 시내에서 20여㎞ 북쪽에 있는 이 무덤은 옛 도읍 평성이던 다퉁 북쪽에서 시내가 있는 분지를 내려다보는 표고 1450m의 방산 꼭대기 고원에 자리잡고 있다. 윈강석굴을 조성한 주역인 문성제의 황후였던 문명태후가 북위의 지배자로서 누렸던 절대권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영고릉은 북만주 알선동 동굴과 더불어 이번 답사의 중요한 목표지 가운데 하나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만큼 답사단원들의 기대감이 컸다. 황토계곡과 시골 마을 이곳저곳을 지나면서 1시간 넘게 달려 방산 인근에 닿았지만,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너무 험해 산기슭에서 차를 멈춰세우고 방산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산기슭을 허위허위 올라가는 답사길은 등산에 가까울 정도로 숨이 찼지만, 올라가며 본 방산 일대의 경치는 가히 절경이었다. 황토언덕에 토굴을 뚫고 살림집과 창고를 만든 지역 특유의 주거형태인 ‘야오동(窯洞)’이 가까이 보이고 멀리 타이항산맥 아래 황토고원의 장대한 대지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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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고릉이 있는 방산 기슭을 올라가는 길에 본 화북 산시 지방의 풍경. 황토언덕에 굴을 뚫고 살림집과 창고를 만든 이 지역 특유의 주거 가옥인 ‘야오동’이 가까이에 보인다. 저 멀리 타이항 산맥 아래엔 산시성 황토고원의 장대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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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시간여를 올라가 방산 정상 평원에서 영고릉을 만났다. 무덤은 늦여름 햇살과 세찬 바람이 엇갈리는 가운데 풀숲 너머 고적한 모습으로 일행들을 맞았다. 높이 23m의 방형 봉토에 남북 길이 117m, 동서 길이 124m에 이르는 이 거대한 무덤은 북위의 절대권력이 남긴 자취를 묵묵히 증거한다. 문명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손자 효문제는 태후를 방산에 미리 쌓은 영고릉에 곧장 장사를 지냈다. 뒤이어 할머니의 무덤 동북쪽에 자기가 묻힐 무덤(수릉)을 쌓기 시작했지만, 완성되기도 전인 494년 남방의 뤄양(낙양)으로 도읍을 갑자기 옮기고 거기에 새로 자기 무덤(장릉)을 만들어 묻히게 된다. 영고릉 옆에 만들다 만 자신의 무덤은 허묘로 방치되었다. 후대인들은 볼품 없는 몰골로 영고릉 옆에 자리한 효문제의 빈 무덤을 ‘만년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효문제가 자신의 무덤 자리까지 팽개치고 천도한 까닭은 뭘까. 중원의 한족 문화를 좀더 폭넓게 흡수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남조 정권의 정벌을 추진하기 위해서 등의 여러 설이 진작부터 나왔지만, 최근에는 어린 시절부터 섭정한 할머니
문명태후와 휘하 인사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수도 평성에 짙게 드리워진 문명태후 세력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만의 권력을 행사하려는 안간힘으로 택한 카드가 훨씬 남쪽인 중원의 뤄양 천도였다는 것이다.
영고릉 봉토를 올라가보면 이 학설이 나름 그럴 듯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능은 평평한 방산 꼭대기에 솟아나 있어 멀리 수도 평성 시내가 훤히 다 한눈에 조망되는 전망을 갖고 있다. 답사단 일행이 다음날 다퉁 시내를 빠져나갈 때 알게된 것이지만, 심지어 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인 어하 위의 천변 다리에서도 멀리 북쪽에 보이는 방산의 능 모습이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눈에 쏙 들어올 정도였다. 죽어서까지 북위의 국정과 도읍을 눈에 휘감으려했던 문명태후의 야망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가 보이는 듯했다. 이런 정치사적 맥락으로 바라보면 이날 오전 답사단이 윈강석굴에서 보았던 이불병좌상이란 북위만의 독특한 불상 형식도 색다르게 비친다. 효문제와 문명태후라는 최고권력자 두명이 서로 암투를 벌이며 병존할 수밖에 없었던 5세기 말 북위 평성의 정치 상황을 불교미술에 반영한 도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까닭이다.
무덤 아래 쪽 허물어진 돌 무더기 아래로 내려가면 태후의 무덤 곁에서 제사지내던 큰 사원·사당 터도 있다. 능과 추모사찰이 일체화된 능역 구조다. 고구려 왕릉에서도 볼 수 있는 얼개여서 북위와 고구려의 밀접한 교류의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리 저리 주춧돌과 기단을 살펴보는데, 며칠전 네이멍구 무천진에서 보았던, 손으로 마구리를 주무른 흔적이 있는 백제풍 기왓장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영고릉과 주변에서는 발굴 결과 회청색, 흑색의 정원석도 출토되었는데, 이 돌들은 2006년 전북 익산 왕궁리의 백제궁궐터에서 나온 괴석과 재질, 모양새가 비슷한 것으로 밝혀져 국내 학계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사원터를 나와 백양나무가 줄이어 자라고 그 아래 양떼가 풀을 뜯는 방산의 비탈길을 내려간다. 일행은 1600년전 효문제와 문명태후의 무덤을 둘러싼 덧없는 암투를 화제로 올리면서 권력 무상을 실감하는 기색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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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북위의 여걸 권력자였던 문명태후 풍씨의 무덤 영고릉으로 가는 길. 사진 위 길옆으로 멀리 보이는 동산 같은 곳이 영고릉이다. 옛 도읍 평성이었던 다퉁 북쪽에서 다퉁분지를 내려다보는 표고 1450m의 방산 정상에 자리잡은 이 무덤은 태후가 북위의 지배자로서 생전 누렸던 절대권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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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오는 길에 만난 팔달령의 만리장성
17일 마지막 일정으로 다퉁박물관을 찾았다. 전날 명당에서 본 백제계 기왓장과 연꽃무늬 새겨진 전돌 등이 다수 나와 있어 분주히 사진을 찍고 감상했다. 점심 뒤 웅장한 타이항산맥 연봉들을 보면서 귀국 비행기가 기다리는 베이징으로 향했다. 백양나무와 플라타너스가 물결치는 가도 사이로 마주치는 웅장한 연봉들을 가로지르며 버스는 달린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연봉을 보면서 우리 민족사의 원류란 무엇일까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선비족의 원류는 기원전 3세기 흉노와 더불어 중국 중원에서 북쪽과 동쪽 변경에서 유목 이민족의 갈래를 형성한 동호다. 동호는 흉노에게 쫓겨 동쪽 만주와 북쪽 네이멍구 초원지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갈래지어 나타난 세력이 선비다. 선비족은 흉노가 쇠퇴한 뒤 이후 만주 북방에서 초원을 타고 내려온 탁발선비와 요서요동에 기반을 다진 모용선비로 갈라져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각각 화북지방과 만주에서 북위와 전연·후연· 북연 왕조를 세워 대결하다 북위가 5세기 북중국을 통일한다. 선비 왕조들은 이런 과정에서 우리 겨레의 뿌리인 예맥족의 부여, 고구려와도 전쟁과 통혼, 문화 교류를 거듭하며 인연을 쌓았다. 6세기 선비의 후예들이 창업한 수·당 왕조는 중국을 통일하고 실크로드 교류를 주도한 대제국으로 당대 세계사를 약동시켰다.
지금 버스가 달려가는 베이징 북방의 외곽 영정하 유역은 고대에 ‘상곡’이라고 불렸던 동호의 본거지였다. 고대 몽골과 북방 만주 유목 세력과 우리 민족은 어떤 관계였을까. 한 핏줄 한 문화에서 갈라진 것인가. 원래부터 달랐을까. 궁금증은 가지를 쳐 나가는데, 눈앞 차창으로 바다링(팔달령)산줄기가 나타나고 비단처럼 산허리를 타고 넘는 허연 성곽 자락이 보였다. 만리장성이었다. 중국 다퉁/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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