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28 09:26
수정 : 2019.09.28 09:42
[토요판] 그림 속 여성 20. 프랑수아 부셰, ‘엎드려 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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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부셰, <엎드려 쉬는 소녀>, 1752년, 캔버스에 유채,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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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도 적었듯, 서구 남성의 상상 속 ‘하렘’(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들이 머무는 규방)은 동양의 권위주의적인 남성에게 독점된, 뇌쇄적 여성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서구 남성들에게 하렘 같은 퇴폐적 공간을 운영하는 동양은 억압적이고 미개한 곳이었으며, 그곳에 갇힌 동양 여성은 ‘새장 속의 새’로 곧잘 비유됐다. 이런 대비를 통해 유럽 남성들은 자기네 문화의 우월성을 확인하곤 했지만, 한편으로는 하렘이라는 공간이 꽤 부러웠던 것 같다. 수많은 미녀가 외부와 격리된 채 옷 벗고 기다리는 단 한 명의 남성. 자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되는 환상을 내심 키우지 않았을까. 그런데 프랑스의 루이 15세(1710~1774)가 그 환상을 진짜 실현했다. 동양엔 없었던 상상 속 ‘하렘’이 프랑스에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바로 ‘사슴 정원’(Parc aux Cerfs)이 그것이다.
한눈에도 앳돼 보이는 소녀가 헝클어진 침구 위에 엎드려 있다. 땋은 머리를 푸른 리본으로 고정한 모습이 딱 어린아이다. 하지만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나이에 어울리는 천진난만하고도 무심한 포즈가 역설적으로 관능성을 더하고 있다. 소녀는 아일랜드 출신 구두장이의 막내딸 루이즈 오뮈르피(1737~1818), 당시 15살이었다. 오뮈르피는 전문 모델이었던 언니를 따라다니다가, 로코코미술의 대가 프랑수아 부셰(1703~1770)의 눈에 띄었다. 부셰는 오뮈르피의 누드를 그리기로 마음먹었고, 오뮈르피는 이에 화답하듯 천연덕스럽게 엉덩이를 드러낸 채 엎드렸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바로 <엎드려 쉬는 소녀>이다. 오뮈르피의 몸을 분칠하듯이 엷게 색칠한 이 작품은 남성들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퐁파두르 부인’(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의 남동생 아벨 푸아송 후작은 작품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혹됐고, 나중에 그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실제로 또 다른 판본이 독일 쾰른에 소장돼 있다). 문제는 푸아송 후작이 이 그림을 루이 15세에게 자랑했다는 점. 그림을 본 루이 15세는 소녀를 당장 자기 앞에 데려오라 했고, 오뮈르피는 결국 1753년 ‘사슴 정원’의 여인이 되었다. 화가인 부셰에게 뚜쟁이 짓을 했다는 비난이 더해진 것은 물론이다.
당시 루이 15세가 가장 총애하던 여성은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루이 15세의 왕성한 성욕을 받아주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그리하여 태어난 기묘한 공간이 바로 ‘사슴 정원’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근처에 사슴 모양 장식의 문이 달린 작은 저택을 마련해 놓고, 성병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성관계 경험이 없는 하층계급 출신의 소녀들을 불러들였다. 그중 한 명이 오뮈르피였다. 이후 오뮈르피의 운명은 급물살을 탔다. 초반에는 왕의 아이까지 낳으며 ‘사슴 정원’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2년 뒤 그녀는 왕으로부터 갑자기 버림받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실세’ 퐁파두르 부인을 가리켜 ‘늙은 여자’라고 험담하며 질투했기 때문. 아마도 오뮈르피는 자신이 어째서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이 되지 못하는지, 왜 작위도 없이 숨어 살아야 하는지 불만을 터뜨렸던 것 같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퐁파두르 부인은 가볍게 웃으며 루이 15세에게 오뮈르피 이야기를 꺼냈고, 루이 15세는 ‘분수도 모르는’ 소녀를 가차 없이 11월 추운 날 새벽 4시에 사슴 정원에서 쫓아냈다. 순진한 오뮈르피는 몰랐던 것이다. 루이 15세가 원한 건 그저 ‘동양의 하렘’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은 그 속에서 ‘왕의 애첩’이 아니라 하렘의 오달리스크, 즉 ‘성노예’였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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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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