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26 17:43
수정 : 2019.09.2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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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진행된 <다다익선>의 모니터 교체 공사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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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작 유지 대책
백남준 행적과 동떨어진 처방이지만
저작권 승계 받은 장조카와의 불화로
‘보존 또는 철거’ 아닌 대안 찾기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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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진행된 <다다익선>의 모니터 교체 공사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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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홀이 구겐하임 판박이라면서요? 곤란한데….”
1985년 11월 행정 신도시인 과천 청계산 기슭에 새로 짓는 국립현대미술관 대들보가 올라갈 즈음에 민망한 풍문이 떠돌았다. 건축계와 미술관 건립추진위원들 사이에서 재미 건축가 김태수씨가 설계한 새 미술관의 나선형 모양 로비홀(램프코어)이 입도마에 올랐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나선형 외관 일부와 빼닮았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의 귀에도 들어갔다. 민족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며 기념비적 건축물 건립에 골몰했던 5공 정부의 정책 기조에 누를 미칠까 봐 추진위원단과 문공부 내부에서는 안절부절못했다. 추진위원이던 문공부 문화예술국장 천호선이 대안을 냈다. “백남준의 작품을 그 공간에 채우는 것은 어떨까요?” 비디오 거장 백남준(1932~2006)의 가장 큰 대표작이자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그의 명작이 된 높이 18.5m의 1003개 모니터 영상탑 <다다익선>은 그렇게 우연한 계기에 태어났다. 원대한 계획을 세워 추진한 거작도 아니었고, 건물의 빈틈을 보강하기 위한 땜질식의 즉흥적 아이디어로 나왔다. 1986년 상반기 한국 정부의 제안을 그가 수락하고 김원 건축가와 2년의 협업을 거쳐 얼핏 경천사터 탑의 윤곽을 연상시키는 <다다익선>은 1988년 9월15일 완공식을 열고 공개됐다. 다다익선 구조물은 애초 작품으로 분류되지 않고 10년간 설치 계약한 한시 시설물이었다. 완공식 날 작가는 자신이 쓴 갓이 구겨지도록 얼굴을 행사장의 케이크에 짓이기는 퍼포먼스를 했다. 한국의 전통건축과 동서양의 건물, 사람들이 잡탕으로 출몰하며 융화되는 세계 최대의 비디오아트를 축복하는 몸짓이었다. 작품의 콘셉트 상당 부분은 백남준의 즉흥적인 구상에서 튀어나왔다고 전해진다. 나선형 공간을 채울 작품의 모니터 수는 애초 200여개로 어림잡았다가 500대, 1000대선으로 늘어났고, 10월3일 개천절을 앞두고 작가가 “많을수록 좋아, 다다익선이지”라고 말하면서 1003개, 제목은 <다다익선>으로 최종 확정됐다. 작품은 계속 틀거지를 바꾸었다. 원래 콘텐츠는 소리 없는 3개 채널이었다가 백남준 개인사를 다룬 소리 있는 채널이 92년 신설돼 4개 채널이 됐다. 백남준은 모니터 브라운관의 내구 기한이 7만~8만시간이란 것을 알았기에, 10년여가 지나면 폐기와 보존 문제가 생기리란 것을 기록에 남겼다. 김원 건축가는 당시 선생에게 모니터 수명이 7만시간인데 10년 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나는 몰라… 난 현재가 중요하지, 뒤에는 누가 알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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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익선>을 구상할 당시의 백남준. 작품 설치 공간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로비홀의 난간에서 천장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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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내구연한이 다하고 부품이 단종돼 불을 끈 다다익선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추석 연휴 직전 전격적으로 회견을 열어 최선을 다해 원형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3년간 복구 프로젝트를 벌여 2022년에 불을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미래의 국보, 보물에 상당하는 문화유산으로서 작품을 인정하고 가급적 손대지 않고 애초 상태를 보존하겠다는 말이다. 미술사의 보루인 미술관의 보수적 입장에서 얼핏 이해갈 만한 선택으로 비친다. 하지만 <다다익선>의 태동과 제작 경위, 그리고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며 현대미술의 덧없음을 이야기한 고인의 생전 언변이나 흐름이란 뜻의 플럭서스 운동에 동참해 사운드와 행위, 찰나적 이미지에 골몰했던 행적을 생각하면 어색하다. 고인은 별로 관심이 없었을 모니터의 상태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고인은 기술자 이정성씨 등 여러 지인에게 내 정체성은 영상 콘텐츠에 있고 형식에는 구애받지 않는다는 얘기를 여러차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속담대로 이번 결정의 세부를 뜯어보면, 미술관의 행보는 우려를 낳는다. 앞으로 이 영상탑은 10년 뒤 20여년 뒤 기기의 내구연한 종료에 따른 보존 대책 논란을 계속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1003개의 모니터 중 최소한 200개 이상이 망가져 있고, 다른 모니터도 얼마나 상태가 망가졌는지 모른다. 이미 2003년부터 이런 내구연한 종료로 작품을 갈아 끼우고 수리하는 사례가 3~4년, 5~6년 단위로 숱하게 이어졌다. 미술관은 그때도 이번 기자회견처럼 최선을 다해서 대책을 마련하고 작품을 유지하겠다는 대답을 숱하게 내놓았다.
<다다익선>의 장래에 대한 지난 20년간 미술관의 해명과 대책은 대체로 비슷했다. 일단 상태를 보면서 끌다가 더 이상 미루지 못할 국면이 되면 모니터를 수소문하고, 일부 또는 전면을 교체하고 원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간다. 일을 안 한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사실 미술관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막후의 이유가 있다. 고인의 장조카로 백남준 작품의 모든 대외 저작권을 승계한 켄 백 하쿠타와의 불화다. 그는 고인의 사후 한국 미술계 지인들에 대해 “삼촌을 이용만 해먹었다”고 극심한 불신감을 드러내면서 소통을 전면 거부해왔다. <다다익선>의 전면 수리나 향후 진로에 관한 대응에 대해서도 최근 미술관의 문의에 일절 응답을 하지 않았다. 미술관이 <다다익선> 수리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건 사실 저작권을 틀어쥔 그의 침묵 탓이다. 윤범모 관장은 “그와의 대화가 안 되는 한 <다다익선>은 원형 보존과 철거 두가지 카드밖에 없다. 백남준에 얽힌 모든 것은 하쿠타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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