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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17 11:53 수정 : 2019.07.17 12:01

201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표조사와 물리탐사를 거쳐 확인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무덤 흔적 현황을 설명한 사진. 무령왕릉을 포함해 정비된 고분은 7기, 일제강점기 보고됐으나 현재까지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고분은 6기, 새롭게 확인된 추정 고분은 41기.(위쪽이 북쪽)

공주 송산리고분군 지표조사·물리탐사 결과
무령왕릉 남쪽선 무덤쓴 문자벽돌도 나와
일제강점기 가루베가 고분 발굴했으나 위치 불명확

201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표조사와 물리탐사를 거쳐 확인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무덤 흔적 현황을 설명한 사진. 무령왕릉을 포함해 정비된 고분은 7기, 일제강점기 보고됐으나 현재까지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고분은 6기, 새롭게 확인된 추정 고분은 41기.(위쪽이 북쪽)
백제 무령왕릉이 자리한 충남 공주 송산리고분군(국가사적) 일대에 고분 40여기가 더 묻혀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7일 발표했다. 연구소는 지난 4~6월 고고학 지표조사와 지하 물리탐사 작업을 벌인 결과 1970년대 이후 정비된 무덤 7기 외에 41기까지 추산할 수 있는 무덤의 자취를 확인했다면서 이날 관련 자료들을 공개했다.

이번 조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중장기 학술조사계획을 세우기 위한 세부 현황을 파악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기초 자료 조사와 지표조사, 과학적 탐사 측량 조사로 나뉘어 단계적으로 진행했는데, 4월 벌인 고고학 지표조사에서 고분군 주변 야산과 내부 정비구역에 흩어진 고분 41기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어 6월부터 무령왕릉 정비구간의 지하 물리탐사를 진행한 결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조사했으나, 관련 기록이 부실해 명확한 위치를 알지못하는 7~9호와 29호분의 흔적까지 파악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국에서는 ‘도굴왕’으로 지탄받는 일본인 가루베 지온이 1933년 <고고학잡지>(23-9호)에 실은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사진이다. 중요 지점마다 개략적인 위치를 표기해놓았다. 가루베는 당시 조선인들의 생계형 도굴이 성행하면서 백제고분 형상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해서 1000여기의 공주지역 고분들을 살펴보고 중요 유적은 기록에 남겼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된 것은 10여기 정도에 불과하다.
신라, 가야와 달리 백제는 땅밑에 매장시설을 두고 봉분을 작게 조성해 지표면에서 고분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연구소 쪽은 고분군 입지특성과 지형을 분석하고, 일제시대 사진자료 비교검토 등으로 무덤 흔적들의 위치를 추정했다고 한다.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을 두었던 5세기말~6세기초 왕과 왕족들의 무덤떼다. 1971년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돼 백제의 무덤 중 유일하게 특정 왕을 입증하는 지석과 함께 막대한 분량의 백제 왕실 보물들이 나온 무령왕릉의 발굴로 유명해졌다. 이보다 앞서 조선시대 나온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이미 백제 무덤들이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일제강점기인 1927∼1933년 아마추어 학자 가루베 지온과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5호분과 7~8호분, 29호분 등을 발굴하면서 모두 29기의 무덤이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현재 고분군 안에 노출된 채 정비된 무덤은 모두 7기로, 계곡을 두고 서쪽에 무령왕릉과 5·6호분이, 동북쪽에 1∼4호분이 자리한다. 1∼5호분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은 전축분의 얼개를 띤다. 연구소쪽은 "흔적을 찾은 고분 40여기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파악한 29기와 어떻게 겹치는지는 구체적인 현장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1~4호분 정비구간에서 확인된 일제강점기 조사 고분의 지하 흔적을 표시한 사진과 유적 흔적 분포도. 지하물리탐사를 이용해 무령왕릉 주변에서 지하 구조물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연구소쪽은 밝혔다..
무령왕릉 서벽 창문모양 장식에 쓰인 ‘중방(中方)’명 벽돌(큰 사진)과 조사에서 수습한 ‘중방’명 벽돌(큰사진 오른쪽 상단). 벽돌의 크기와 글자의 위치로 볼 때, 무덤방 벽면에 세워 창문모양을 장식한 것과 유사하다.
연구소의 지표조사에서는 '중방(中方)‘ 글자가 있는 백제시대의 벽돌도 수습됐다. 이 벽돌은 무령왕릉에서 남쪽으로 80m 떨어진 지점에서 나온 것으로, 무령왕릉에 쓰인 벽돌 부재 일부와 같은 종류로 드러났다. 연구소 쪽은 “무령왕릉 축조에 쓰인 7927점의 벽돌 가운데 `중방‘명 벽돌은 30점에 불과한데, 벽돌의 크기와 글자의 위치로 볼 때 왕릉 내 긴 벽면에서 창문 모양을 장식한 8점의 벽돌부재와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벽돌을 주운 위치가 무령왕릉 남쪽 부근이고 일제 강점기 보고된 17호분 벽돌무덤의 추정 위치와도 70여m 떨어진 점으로 미뤄, 발견 지점 일대에 또다른 벽돌무덤이 남아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연구소 쪽은 “해방 뒤에도 무령왕릉을 제외하곤 국내 전문가들의 조사가 거의 없었던 백제 중요 고분군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현황조사를 벌였다는 의미가 있다”며 내년부터 추정고분들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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