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피해자 절규한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15년 전쟁이 초래한 피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직 많기 때문에 여전히 ‘전후’ 가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제2의 전전(戰前)”
태평양 전쟁의 피해자와 유족들이 절규하고 있다. 한·일 두 정부가 정치적 야합으로 급조한 협정문서 뒤에 숨어 역사의 망각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5년 일본에서 출간된 <전쟁책임>(논형)은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더욱 새롭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으며,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역사책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1960년대부터 통박한 ‘선구자’인 이에나가는 400여쪽에 걸친 이 책에서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태평양 침공 등으로 이어지는 ‘15년 전쟁’에 대한 실증적 추적을 펼친다.
가해·피해자 증언통해 현장복원
특히 수많은 전쟁범죄 사례를 당시 문헌과 사료, 개인기록 등을 통해 집요하게 발굴했다. 밋밋한 숫자와 통계 대신, 가해자와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을 인용하며 그 현장을 복원했다. 그는 “일본군만한 잔학성을 발휘한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단언한다. 태평양 전쟁에 대한 ‘단편적’ 지식만 갖고 있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그가 드러내는 총체적 참상은 경악할만한 것이다.
그의 전쟁책임론은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일본의 책임이다. 이는 침략행위에 대한 △국민국가 전체의 총체적 책임 아래 △천황과 고위관료 등의 법적 책임 △적극적 인권침해를 한 관리들의 법적 책임 △중하급 관리 및 일반국민이 져야할 도의적 연대책임 등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이에나가는 중하급 관리 및 일반 국민들의 책임에 대해 상세하게 논증한다. 일반 국민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시대에 순응한 피해자적 측면이 더 크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국가에 대해서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일본국가에 의해 피해를 받은 식민지 민족이나 피침략민족에 대해서 도덕적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
일본 국민 도의적 연대책임져야
특히 “(명령에 복종했다는 논리로) 모든 것을 국가의 책임으로 돌려 중하급 관리 개인의 책임을 부정하는 자세”를 비판한다. “직권남용없이 명령에 복종한 경우는 도의적 책임을 물어야 하고, 인민에 대한 탄압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관리는 양심에 의한 자기비판에 맡기지 말고 엄하게 법률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책임론은 당시 연합국을 향해서도 전개된다. 이에나가는 당시 미국의 무차별 공습과 소련의 잔학행위를 들춰낸다. 그가 보기에 “일본의 비군사화·민주화보다도 반공군사동맹을 더욱 중시한” 미국의 점령정책은 원폭투하를 비롯한 연합국의 전쟁범죄를 일본의 전쟁책임과 함께 ‘중화’시켜버렸다.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의 전쟁책임과 미국의 대일전쟁책임을 시야에서 벗어나게 하는 효과”를 불러왔고, 결국 일본의 전쟁책임을 덮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전쟁책임에 입다물고, ‘미래의 전쟁’을 함께 도모하는 상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주도한 도쿄전범재판은 진정한 전쟁책임을 밝혀내지 못했다. “일본 국민의 손에 의해 전시 지배자들의 전쟁책임을 추궁하지 못한 결과, 이후 일본 내에서 평화주의 이념을 무력화시키고 과거의 전쟁을 미화·정당화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그런 (우경화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 거꾸로 ‘위험사상’인 것처럼 박해받게 됐다.”
“반공 동맹” 미 점령정책도 추궁
이에나가는 “15년 전쟁이 초래한 피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직 많기 때문에 여전히 ‘전후’가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제2의 전전(戰前)”이라고 경고한다. 태평양 전쟁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평화를 약속하는 새로운 한일협정의 시금석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이에나가의 저술은 <일본문화사>(까치·1999년)가 유일했다. 대표적 저작인 <태평양전쟁>(이와나미 문고·1965년)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비판할 때마다 이에나가를 인용했으면서도 “특히 조선인에 대해 일본은 총체적 책임을 진다”고 말해온 그의 진면목에 대해 한국 지식사회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이에나가 사부로는 누구
지극히 평범했던 실증 사학자
군국주의 회귀조짐 그를 일깨우다
20여년 교과서 검정제 위헌소송도
이에나가 사부로(19132002)는 학자적 양심과 실증적 연구, 그리고 이로부터 말미암는 지적 실천이 무엇인지를 한평생 웅변했다.
“어리석은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에나가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평범한 실증사학자에 불과했다. 일본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도쿄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사상사를 전공해 모교 교수로 봉직하던 그로선 어쩌면 당연한 ‘인생행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나가는 그런 자신을 “생생한 현실사회에 등을 돌리고 (문헌연구라는) 절대적 세계로 눈을 돌린 ‘방관자’였다”고 꾸짖는다. “광신적 일본주의에 대해서는 늘 분노의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군국주의의 광풍 앞에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도피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를 일깨운 것은 미국이 추진한 일본의 재군비 정책과 이에 따른 군국주의 회귀 움직임이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 나는 썩은 유학자가 됨으로써 허망된 유학자가 되는 것을 피했다. 지금에야 내 자신이 소극적 의미에서 전쟁범죄인(전쟁 방지의 의무를 게을리한 부작위의 범죄인)이었음을 자책한다. 이번에야말로 이런 후회를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동포를 파멸로 이끄는 힘에 대항해 용감하게 들고 일어서야 한다.”(1953년, <형성>지 기고글)
나이 마흔에 자신의 삶을 근본부터 성찰한 그는 죽을 때까지 이 깨침을 놓치 않았다. 학자로서 그는 일본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침략전쟁의 전반에 대해 실증적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대표적 저작인 <태평양전쟁>은 그 결실이었다.
이에나가는 저술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1962년 자신이 집필한 고교 역사교과서인 <신일본사>가 문부성으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자, 1965년 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청구했다. 일본 역사교과서가 그동안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난징대학살·731부대 등 ‘아시아 침략행위’에 대해 서술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 소송은 이후 32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일부 승소, 일부 패소 등의 판결이 거듭됐지만, 결국 검정제도 위헌 판결까지 이르진 못했다.
그러나 학자적 양심과 집념이 깃든 30여년의 소송은 일본 사회의 무딘 역사관에 경종을 울렸다. 법정을 통해 역사학계·교육계·헌법학계 등이 논란을 벌였고, 곳곳에서 역사교과서 문제를 고민하는 시민모임이 만들어졌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천되기도 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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