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우익성향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만들어 후소샤 출판사에서 내놓은 일본 역사교과서의 표지사진.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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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 산고끝 결실 공동 역사교과서를 위해 한·중·일 세나라가 처음으로 마주 앉은 것은 2002년 3월이다. 중국 난징에 있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포럼’을 열었다. 일본 후소샤 교과서 사태가 일어난 2001년에 대한 반성의 자리였다. 일본 우익은 물론 일본 정부조차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제의 난징 대학살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이런 모임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적이었다. 세 나라에서 모두 110여명의 학자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6개 부문에 걸쳐 27명의 발표자와 18명의 토론자가 나서 무려 닷새동안 연쇄 학술회의를 열었다.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해 사상 처음으로 한·중·일의 양심세력이 함께 머리를 맞댄 것이다. 그 논의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으로 모였다. “교과서 문제가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문제이자 동아시아 평화정착의 문제이며, 이를 해결하려면 아시아 시민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세 나라의 지식인들은 이 자리에서 공동 역사교과서 개발에 합의했다. 2005년을 평화원년으로 만들려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이후 ‘동아시아 평화포럼’으로 이름지어진 대화 테이블은 숨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그해 8월 서울 국제회의와 10월 실무회의를 거쳐 12월 도쿄 국제회의에서 교과서 대항목에 합의했다. 2003년에도 국제회의와 실무회의가 이어졌다. 교과서 목차를 어떻게 구성하는지가 최대 관건이었다. 도쿄와 베이징을 오가는 지리한 국제회의를 거쳐 마침내 11월 서울 국제회의에서 교과서 목차에 최종 합의했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씨름은 2004년의 산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 나라가 각각 본격적인 원고 집필에 들어갔지만, 각국 집필위원들의 글을 일어·중국어·한국어로 각각 번역하고, 이에 대한 검토의견서를 다시 번역해 공통 검토한 뒤 재집필하고, 또한번 번역을 거쳐 최종 확정하는 일이 반복됐다. 집필에 참여한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공동역사교과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공감없이는 도저히 치러낼 수 없는 고통스런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세 나라의 역사 교과서 체제에 함께 적용될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것도 힘겨운 작업이었다. ‘역사 부교재’라는 명칭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3국 집필진 매달 한번꼴 토론
새시각 반영 위해 ‘교차수정’ 3년에 걸쳐 세 나라의 집필진 30여명이 거의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가진, 말 그대로의 ‘대장정’은 이달 말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제10차 국제회의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남은 일은 공동원고를 각 나랏말로 번역해 출판하는 것과 이를 학교 현장에 배포해 사용하는 일이다. 세나라 모두 집필단계에서 교사 또는 사범대 교수들이 참여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19세기 말 세 나라의 개항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다루는 공동역사교과서는 중학생들의 역사수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역사서술의 눈높이를 맞췄다. 이 교과서는 특히 일본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의식’하고 있다.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이 끝나는 5월에 맞춰 출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을 덮는 ‘평화 교과서’로 우뚝 서려는 것이다. 이 일이 자리를 단단히 잡고 나면, 고대사와 중세사를 가로지르는 공동역사인식의 대형 프로젝트도 기지개를 펼 것으로 기대된다.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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