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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인 힌두쿠시 산맥. 고선지 장군은 저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서역원정을 실시해 동서교류사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왼쪽 인물화는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가 제작한 고선지 장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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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후예 ‘파미르 주인’ 중세 동서발길 빗장 열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가장 가엾고 불쌍한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유랑민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나라가 망해서 쫓겨났거나, 아니면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다. 경위야 어떻든 이들 유민들은 망향의 설움 속에 이방인들과 어울려 살면서 부지불식간에 고국의 문명을 전파하는 ‘문명 교류인’의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세계인으로 성장하여 고국의 위상을 빛내기도 한다. 반만년 우리 겨레의 역사에도 이러한 이른바 ‘유민 세계인’이 적지 않다. 우리는 그러한 ‘유민 세계인’의 원형을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주름잡으며 일세를 풍미한 희대의 명장 고선지에게서 찾아보게 된다.
고선지는 우리 겨레 고유의 기개를 떨치면서 중세 동서관계사와 전쟁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영웅이다. 그는 망국의 비운을 삼키며 이국 땅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遺民)의 후예다. 아버지가 변방수비군인 안서군(현 신장위구르 자치주 쿠차에 주둔)의 한 중급장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며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에 들어갔다. 그는 용모가 빼어나고 활을 잘 쏘며 말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감하고 성품도 출중해 20대에 벌써 유격장군이 되어 파격적인 승진가도를 달린다.
당 장수로 5차례 서역원정
고선지는 11년 동안(740~751년) 다섯 차례나 대군을 이끌고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산맥, 톈산산맥 같은 험산준령을 넘나들면서 서역원정을 단행했다. 그 중 네 차례는 승전했으나 마지막 한 차례는 패전의 고배를 마셨다. 전장에서 돌아온 패장은 열혈을 식혀오다가 안록산의 난(755년)이 일어나자 정토군부원수로 임명되어 재기의 계기를 맞았다. 하지만 억울한 모함에 걸려 진중에서 참수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패전과 참수라는 비운으로 인해 인생으로서 유종의 미는 거두지 못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거둘 수도 없었지만, 그의 서역원정은 당의 서역 경영이나 중세사의 전개에 불멸의 기여를 하였다. 이와 더불어 유민 번장(蕃將, 이민족의 장군)으로서 그의 고달프지만 꿋꿋하고 당당했던 한평생은 우리 겨레의 숭고한 얼과 넋을 이역 땅에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고선지의 서역원정은 중세 동서관계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그의 4차에 걸친 연전연승의 서역원정은 승승장구하는 이슬람의 중앙아시아와 중국 동진에 제동을 걸었는가 하면, 그의 최후 일전인 탈라스전투(751년)의 패전은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는 계기를 조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탈라스전투는 이슬람군과 당군 사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어난 직접적인 군사충돌로서, 그 결과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하여 양대 강국인 이슬람제국과 당제국이 동서에 병립하는 중세의 새 국제질서가 확립되었다.
전후 선린·교육 물꼬 트여
이러한 국제질서의 재편과 더불어 고선지의 원정은 동서문명의 교류에도 큰 발자취를 남겨놓았다. 그의 원정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한 이슬람제국과 당제국 간의 숙명적인 무력충돌이었지만, 일단 승패가 갈라진 후에는 서로가 승복하고, 그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두 제국 간에 선린·교류의 기운이 싹텄으며, 서로의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이것은 역사에서 보기 드문 예다. 탈라스전투 직후 이슬람제국은 당에 사절을 파견하고, 이 전쟁에서 포로가 된 두환(杜環)은 이슬람세계에 10여 년간 머물고 돌아와 이슬람세계에 대한 첫 현지견문록을 펴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원정을 계기로 슬슬(瑟瑟: 일종의 보석)이나 한혈마(汗血馬) 같은 서역문물이 중국에 들어왔으며, 그것이 신라에까지 알려졌다.
흔히 고선지의 서역원정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것이 제지술의 서방 전파다. 오늘날과 같은 이슬람문명이나 유럽문명의 발달은 결코 제지술의 도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슬람세계나 유럽에 대한 제지술의 전파가 고선지의 서역원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때, 그 원정이 갖는 문명교류사적 의미는 거듭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탈라스전에서 이슬람군에게 포로가 된 2만 당군 가운데는 제지기술자들도 들어 있었다. 중국의 제지술이 그들에 의해 우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전해진 후에 점차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슬람세계 각지에 퍼졌다. 12세기 중엽부터는 아랍인들을 통해 유럽 각지에 전달되어 마침내 유럽에서의 출판인쇄술을 탄생시킨 촉매제가 되고, 그 영향은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인류문명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변이었다.
고선지의 서역원정이 갖는 이러한 세계사적 의미는 유민으로서 그의 세계성을 말해준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고구려인 특유의 기질이 깔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우리의 겨레사를 빛낸 ‘유민 세계인’의 원형으로,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고선지는 천부적 재능과 불굴의 투지, 탁월한 지략, 그리고 고매한 품성을 겸비한 희대의 위인이다. 제2차 서역원정인 소발률(小勃律) 원정에서 나름의 삼군법(三軍法)과 기상천외한 묘책으로 전승고를 울린 사례는 무장으로서 그의 지략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원정 도중에 주요 요새인 연운보를 공략하기 위해 지장 고선지는 군사를 앞과 중앙, 후미에 배치하는 중국의 전통적 삼군법과는 달리, 좌와 우, 중앙의 세 길로 전진하는 창의적 삼군법을 도입했다. 공격목표인 수도 아노월성을 지척에 두고 해발 4600여 미터의 험준한 탄구령에 이르렀을 때, 100여 일의 강행군을 해온 사병들이 지칠 대로 지친데다가 일부 부하들이 겁에 질려 전진을 거부한다. 그러자 그는 진군에 앞서 군사 20여 명을 적병으로 가장시켜 산 아래에서 영접하는 체한다. 이를 목격한 군사들은 크게 사기가 높아져 결국 공략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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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통해 제지술 서방 전파
고선지의 인격에서 두드러진 것은 넓은 아량과 지인선용(知人善用)이다. 소발률 원정에서 개선하는 도중 장안에 사람을 보내 승전보를 전한 데 대해 상관인 절도사 부몽영찰은 자신에 대한 ‘불경’으로 오해하고 대로하여 ‘개똥이나 핥아먹을 고구려 종놈’이라는 참을 수 없는 민족적 멸시를 안긴다. 분명히 억울한 질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관인 절도사에게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여전히 ‘중승’이라고 존칭하면서 사과를 표한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현종은 시비를 가려 부몽을 해임하고 고선지를 그 후임으로 임명한다. 그러자 부몽은 스스러워서 고선지를 피하려 했으나 그는 종전과 다를 바 없이 그를 존대한다. 그리고 절도사로 임명된 후, 평소 그를 질시하고 감시하던 몇몇 부하들이 불안에 떨자, 그들을 한데 모아놓고 “제공은 얼굴은 사나이 같으나 속은 계집과 같으니 어찌된 영문인가”라고 한바탕 꾸짖고 나서 몇 사람을 채찍으로 갈기는 시늉을 한다. 그러고는 다시 “제공들이 회개하니 이로써 다 풀렸다”고 하면서 “제공들이 품고 있는 한에 대해 만약 내가 이렇게 말을 꺼내지 않으면 오히려 걱정할 것이 아닌가. 이제는 할 말을 다 했으니 속이 다 후련하다”라고 태연자약한 자세로 상대를 안심시킨다. 이것은 영걸로서의 고선지의 호방한 성격과 능수능란한 사태처리 방법의 일단을 생동하게 보여준다.
고선지가 그토록 간고한 원정과 번장으로서의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인선용의 지략과도 크게 관계된다. 그는 유능한 부하들을 선임하여 믿고 키워서 자신의 유력한 협조자로 선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관 봉상청(封常淸)이다. 원래 봉상청은 집안이 가난했고, 체구가 왜소한데다 애꾸에 절름발이여서 누구도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선지는 그의 충정과 뛰어난 재주를 믿고 종관으로 채용한다. 상청은 출정의 고비마다 출중한 지략으로 은인 고선지를 보좌하여 전승에 크게 기여했다. 탈라스전투의 고배도 함께 마셨고, 모함으로 참수되는 최후의 운명도 함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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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의 주인’으로 그 명성과 위세를 떨친 고선지는 당의 무장이기에 앞서 고구려 땅에 태를 묻은 고구려인의 후손이며, 따라서 명실상부한 고구려인이다. 그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당나라의 서쪽 변방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망국 유민의 한을 오직 무를 닦는 정열로 승화시켜 마침내 당대 으뜸가는 명장으로 인류 전쟁사에 희유의 전공을 쌓아 올렸다. 힌두쿠시의 험로를 극복한 고선지의 위용을 높이 평가하여, 20세기 초 이 지역을 직접 답사한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스타인은 “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다룰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보다 더 성공적인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폴레옹 알프스돌파보다 낫다”
실로 고선지야말로 몸은 비록 이역에 있었지만 겨레의 거룩한 얼과 넋을 드날린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명장으로서의 고선지, 세계인으로서의 고선지, 그의 용맹과 위훈은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예사로이 여긴다는 ‘귀곡천계’(貴鵠賤鷄), 즉 드물고 먼 것을 귀하게 여기고 흔하고 가까운 것을 예사로이 여기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며, 집 떠난 자식을 더 생각하는 것은 세간의 모정일진대, 우리는 나라 밖에서 애환의 겨레사를 함께 일구어 온 사람들을 잊지 말고 반겨 맞아주며, 그들과 함께 온전한 겨레사를 엮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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