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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2 16:51 수정 : 2005.01.02 16:51

세밑 유리닫집에 싸인 원각사터 10층탑 앞에는 국태민안을 비는 연등이 칼바람에 흔들렸다. 관리소 직원은 “탑골 공간의 유난한 격변은 북촌 최고 교통요지의 땅값 노릇을 톡특히 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박제가·박지원 학문·술잔 나누던…

매주 월요일치 문화면에 선인들이 국토 곳곳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남겼던 옛 글과 그림 따위를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보는 ‘묵향 속의 우리 문화유산’을 싣습니다. 옛 선인들의 기록자료를 통해 문화유산의 그윽한 멋과 향기를 조망하는 인문적 탐방기가 될 것입니다. 편집자

‘한번 그곳을 방문하면 돌아가는 것을 잊고 열흘이고 한달이고 머물렀고, 지은 시문과 척독이 곧잘 책을 만들어도 좋을 정도가 되었으며, 술과 음식을 찾으며 낮을 이어 밤을 지새곤 했었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였던 초정 박제가(1750~1805)가 문집 <백탑청연집>(번역 안대회 영남대 교수)에서 이렇게 극찬한 학문적 쾌락의 장소가 3·1독립운동의 본산으로 유명한 탑골(파고다)공원과 원각사터 10층 석탑이었음을 아는 일반인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흰 대리석 탑이라 하여 옛적 ‘백탑(白塔)’으로 불리던 원각사 탑 주위는 18세기 후반 지성사를 수놓았던 박제가, 박지원, 유득공, 이덕무, 백동수 등의 서얼 지식인들이 학문과 취미를 논했던 요람이었다. 백탑 주변에 모여 시문을 읊고, 실사구시의 학문을 천착했던 이른바 ‘백탑파’의 발상지였던 것이다.

18세기 실학의 꽃 피운
‘백탑파’는 여기서 만났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지금은 ‘노인들의 천국’ 됐지만

‘도회를 빙 두른 성 중앙에 탑이 솟아 멀리서 보면 으슥비슥 눈 속에서 대나무 순이 나온 것처럼 보인다’고 초정이 묘사했던 백탑은 구한말까지 한양성 어디서도 보이던 전통 마천루였다. 지금은 고층빌딩 숲에 묻힌 데다 유리보호각까지 씌워진 신세가 되었으나 당시엔 사통팔달하는 교통 요지로서 도시적 시정을 연출하는 상징물이었다. 관리등용의 길이 막혔으나 학문을 소비하려는 욕구는 끓어넘치던 서얼 지식인들에게 백탑 주변의 ‘다운타운’은 생각나면 당장 편하게 만나 울분을 나누고, 청나라의 북학사상을 교유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다.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릴 때까지 탑 주위 벗들의 집을 돌며 술과 문무를 논했다는 박제가의 회고담은 학문적 낭만주의의 진수라할 만하다. 초정의 글에는 이덕무의 집이 백탑 북쪽, 이서구의 사랑과 관재 서상수의 서재는 서쪽에, 거기서 북동쪽으로 꺾어지면 유금, 유득공의 집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특히 서상수의 공부방인 ‘관재’는 1760~1770년대 이뤄진 백탑파의 회합이 주로 열린 ‘아지트’였다. 백탑 주변의 친우 집에서 만나 수표교, 몽답정 같은 주변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를 쓰고, 자기네 소장품을 감상하고 나누는 경매도 했다. 꽃의 꿀에서 나온 밀랍으로 다시 매화꽃을 만드는 제조법을 기록에 남긴 이덕무의 ‘윤회매’ 일화처럼 백탑 주변의 도회적 세태나 특정 사물을 관찰하고 기록한 이들 특유의 마니아적 취향, 곧 벽(癖)은 독특한 소품문과 세태시들을 낳았다. ‘들창 아래 질화로가 따뜻하고 포근할 때 시사 벗들은 농익은 대화 보따리 풀어놓네…’(이덕무)라고 노래했던 문인들의 면모와 정취를 백탑은 묵묵히 다 지켜보았을 터다.

탑골공원터는 역사적으로 땅기운이 억세고 기구했다. 고려시대 거찰 흥복사를 세조 때인 1465년 개칭해 새로 지어진 원각사터가 전신이었다. 연산군 때는 승려들을 내몰고 기생들의 살림집인 기방으로 전락했다가 중종 때 시청격인 한성부 청사가 들어섰지만, 책임자가 급사하자, 함부로 범접하면 불가의 벌을 받는 곳이라 해서 빈 공간으로 방치된다. 그 공간에 조선후기 서얼지식인들의 문화가 차고 들어와 화려한 꽃을 피운 셈이다. 1467년 세워진 백탑은 이런 탑골의 조락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대리석에 석가모니 수행도와 불회모습, 여래좌상 조각 등을 정교하고 세련된 수법으로 조각한 이 걸작 탑은 문화재적 가치 못지않게 주변 북촌의 문화활동을 총괄하는 화엄의 상징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백탑파의 호시절이 간 뒤 탑 주위는 격심한 변화를 겪는다. 1895~96년 조선의 재무권을 장악했던 영국 세무사 브라운의 주도로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이 된다. 대한제국 양악대가 관현악 등의 클래식 음악회를 최초로 상설연주했던 콘서트장도 겸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던 군중들의 감격은 이후 이곳을 민족주의의 성소, 단골 집회장으로 바꿔버렸다. 해방 뒤엔 노인, 실직자 휴식터로 급식소 등 구제시설 밀집한 복지공간이 된다. 2001년 공원 시설을 정비하고, 주변 급식소 등도 옮겨 엄숙한 분위기를 되찾았지만, 담배를 청하는 노숙자나 캡을 둘러쓴 어르신들의 쓸쓸한 발걸음은 여전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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