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3 06:00
수정 : 2020.01.0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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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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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의 앞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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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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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한 신분의 궁중 나인에서 임금 ‘호리는’ 재주 하나로 왕비석을 쟁취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사약으로 삶을 마감한 악녀, 우리에게 각인된 장희빈(1659~1701)의 이미지다. 그녀를 설명하는 언어의 틀은 대체로 희화적이고 악의적이다. 반면에 적수 인현왕후(1667~1701)는 고귀한 신분에 선한 본성의 소유자로, 악녀의 투기 모략으로 폐출되지만 다시 왕비로 돌아오는 사필귀정의 아이콘이다. 그런데 1차 자료라고 할 <숙종(보궐)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들의 행위가 선악의 식상한 프레임에 갇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원자료에도 조작과 억지가 없을 수 없어 발화자의 당파적 맥락을 잘 가려 읽어야 한다.
은밀하게 등장한 장씨가 폭음을 남기고 사라진, 17세기의 마지막 20년은 서인과 남인의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수시로 두 권력이 교체되는 환국(換局)의 정국이었다. 희빈 장씨가 남인쪽 대표선수라면 왕비 민씨는 서인쪽 대표선수다. 두 여자는 자신이 속한 당파와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나름의 권력을 주체적으로 행사한다. 절대 권력자의 마음을 장악함으로써 자신과 당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인데, 한 사람의 노력보다는 장(場)의 운동으로 굴러간다고 하는 게 맞다. 더구나 왕의 모후 명성왕후도 지적한 바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는” 왕의 마음을 붙들어 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노론 지도층에 속한 인현왕후의 실제는 ‘선한 피해자’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장씨 대항마로 노론의 딸 김씨를 후궁으로 들인 것도 그녀이고, 아무도 검증할 수 없는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장씨를 파멸시키고자 한 것도 그녀다. 즉 왕비 민씨는 꿈에서 선왕과 선후를 만나, “숙원(장씨)은 전생에 짐승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였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과 “장씨의 팔자에는 자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숙종은 투기가 통하지 않자 사기(邪氣)를 부리며 자신의 부모를 끌어들이고 원자의 존재를 부정했다며 격노하고 폐출을 명령한다. 민씨의 발언은 숙종이 직접 인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파적 맥락에 따른 조작이나 모함과는 다르다. 연적이자 정적인 장씨와 정면 승부를 벌인 민씨 역시 나약한 희생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다.
주인공 장희빈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녀는 대대로 역관인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조부와 외조부가 모두 정3품과 종4품 벼슬의 역관이었고, 아버지 장형과 당숙 장현 등 온 집안이 역관에 종사했다. 통역관으로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던 그들은 사적으로 무역을 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데, 역관의 수장인 장현은 거부로 이름이 났다. 그는 사비를 내어 사신들의 편의를 돕기도 하고, 거금을 쾌척하여 중국 비장의 도서를 구입하여 왕실에 바치기도 한다. 희빈 장씨의 왕실 입성이 당숙 장현과 연관되면서 둘이 함께 공격을 받는데, 부호이면서 중인이라는 사실이 사대부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잦은 외국 출입에서 얻은 견문과 통역이라는 업무 과정에서 획득한 교감의 능력은 가문의 유전자로 희빈 장씨에게도 각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장희빈을 두고 ‘어미가 여종이고 그녀 또한 사생아’라는 것은 근거 없는 음해성 기사임이 당시에 이미 밝혀졌다.
왕비 생활 3년 6개월, 궁궐 별채에 유폐된 희빈 생활 7년. 300년이 넘도록 악녀로 살아온 장희빈, 이젠 그 이미지를 벗어날 때도 되었다. 희빈 장씨와 왕비 민씨의 관계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자 양반과 중인의 대결이었다. 위기를 타개하고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려고 벌인 그녀들의 다양한 악행은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었다. 증명하기도 애매한 저주의 죄목을 쓰고 자진으로 삶을 마감한 장씨. 추국 기록에서 만난 그녀는 냉엄한 현장에 던져진 열 살도 안 된 아들의 미래를 기원하는 종교적 감수성이 풍부한 한 평범한 여인이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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