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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3 06:00 수정 : 2020.01.03 10:12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 지음/아작·1만4800원

정세랑(사진)은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을 자유롭게 오가며 작품을 쓴다. 첫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2018)에도 판타지와 역사물 같은 장르적 작품들이 포함되었지만, 그의 새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온전히 에스에프 단편들만을 모은 책이다.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 갇힌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닌 어떤 능력으로 공동체에 해를 입히게 된 이들. 가령 교사였던 여승균은 그의 목소리를 오래 들은 이들로 하여금 살인 충동에 굴복하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 마음속 바람이 머리카락과 함께 떨어지면 사람들이 그 바람을 행동으로 옮기게 만드는 하민,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을 남들에게 옮기는 경모, 주변 사람들을 모종의 중독자로 만드는 연선 등이 또 다른 수용자들이다. 이 소설과 ‘모조 지구 혁명기’는 에스에프라기보다는 판타지적 발상에 만화 같은 액션을 가미한 작품들이어서 재미있게 읽힌다.

연작 넷으로 이루어진 ‘리셋’과 ‘7교시’는 대멸종과 그 이후를 다룬 작품들이다. ‘7교시’는 대멸종 이후를 사는 학생 아라가 현대사 수업에서 멸종 이전 시기에 관해 공부하는 내용이다. 아라와 친구들이 공부하는 텍스트에서 멸종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육식. “사람들은 온갖 동물을 온갖 방식으로 먹었다.” 같은 생명체인 동물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그 가죽과 깃털을 옷으로 만들어 입었던 인간들의 행태는 ‘생명권’ 차원에서 비판과 반성의 대상이 된다. “성장만을 향해 폭주하는 체제를 끌고 가려고 애쓰던 기업이, 자본이,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환경주의와 페미니즘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처럼 기능”하면서 인류는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리셋’에서는 인간들이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자 거대한 지렁이들이 우주선을 타고 와 인간이 만든 모든 인공물을 삼켜 버린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에 속한 앤은 지렁이의 정체를 확인하러 떠난 모험 길에서 뜻밖의 결정적인 진실과 맞닥뜨린다. 지렁이 출현 70여년 뒤를 배경으로 한 연작 마지막 편에서는 사태가 마감되고, “리셋에서 배운 것”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이밖에도 치매 환자의 단기 기억 향상을 위해 개발된 약이 시험과 연애, 고문, 범죄 수사 등 다른 분야에 활용되는 양상을 추적한 ‘리틀 베이비블루 필’ 등 수록작들은 정세랑의 발랄한 상상력과 진지한 문제의식을 아울러 보여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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