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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3 06:00 수정 : 2020.01.04 21:46

600년 만에 모습 드러낸 중세 벽화…거미·돼지의 상징은 인간의 오감을 뜻해
왕·바퀴의 의미 찾으려 헤맸으나 ‘막다른 길’…새로운 지적 여정 떠날 수밖에

[책&생각]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18) 롱소프의 바퀴. 도상학으로의 길 1

이미지를 연구하다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발견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발견은 우리를 새로운 인식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연구자를 새로운 연구분야로 이끌기도 한다. 이번 글부터 세 번에 걸쳐 이어지는 이야기는 필자를 처음 도상학이라는 영역으로 발을 들이게 했던 14세기의 어떤 이미지와 그에 얽힌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것이다.

이미지를 보자.(사진 1) 왕이 서 있다. 그의 몸 위로는 거대한 바퀴가 그려져 있다. 왕은 오른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듯하고 그의 시선은 오른쪽 둥그런 모양의 어떤 물체를 향해 있다. 그림에서는 잘 알아보기 어렵지만 이 둥그런 물체는 거미줄 위에 앉은 거미다. 거미 말고도 다른 동물들이 바퀴 주변에 보인다. 거미 아래로는 매가, 그 아래로는 원숭이가, 거미의 맞은편에는 멧돼지,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상태가 나빠 머리만 보이지만) 머리에 볏을 단 닭이 그려져 있다. 무슨 의미인가?

사진1. 다섯 감각의 바퀴. 롱소프 타워, 케임브리지셔 피터버러. 14세기. 위키커먼스 제공
중세 기사 집 거실 벽의 미스터리

이 이미지는 영국 케임브리지셔 피터버러에 있는, ‘롱소프(Longthorpe) 타워’라고 불리는, 중세 기사가 거주하던 건물의 거실 벽에 그려져 있다. 이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1320년대 후반에서 1330년대 초반으로 여겨지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약 600년 사이에 누군가가 그 위에 잔뜩 칠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건물을 수리하던 중 칠이 벗겨지면서 천장부터 온 벽을 덮고 있는 이미지들이 드러났다. 하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발굴했음에도 그림의 색이 모두 없어져 본래의 아름다움이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들의 의미에 대해 중대한 정보를 담고 있을 글귀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곳의 몇몇 이미지가 다른 데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독특한 상징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지적 도전만큼 학자의 피를 끓게 하는 것은 없다. 이미지들의 의미에 대해 꽤나 이름있는 여러 연구자들이 이런저런 코멘트를 했다. 긴 글도 몇개 쓰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논의 뒤에도 만족스러운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저런 논의 뒤에도 만족스러운 결론은 나지 않았다. 오늘 이야기하는 왕과 바퀴, 동물들의 이미지도 그 중 하나이다.

그래도 다섯 동물이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을 나타낸다는 것을 밝힌 것은 큰 수확이었다. 거미는 촉각을 의미한다. 맨 아래 원숭이는 무언가를 먹고 있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 미각이며, 멧돼지는 청각을 의미한다. 매는? 많은 사람이 시각이라고 말하겠지만 여기서는 후각이다. 시각을 의미하는 것은 닭이다.

그러나 다섯 동물의 의미를 밝혀낸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왕과 바퀴의 이미지를 놓고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왜 이들 감각의 상징을 바퀴 주변에 배치했을까? 왕은 누구일까? 왜 바퀴는 왕의 몸 앞에 세워져 있을까?

처음 필자가 이 이미지를 본 것은 베를린 포츠담 광장 근처에 있는 제2국립도서관 구석에서 중세 말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운명의 여신에 대해 연구할 때였다.(연재물 12~14회 참조) 이 이미지를 다룬 어떤 유명한 미술사가는 이 그림의 바퀴가 운명의 여신의 바퀴의 변형이라고 주장했다. “운명의 여신의 바퀴는 불안정과 덧없음의 상징이다. 그 위에 올라탄 이들은 헛되이 명망과 권력, 부를 좇지만 종국에는 운명의 여신의 변덕에 희생되어 비참한 결말에 이르고 만다. 인간의 다섯 감각을 바퀴에 올려놓은 것도 인간에게 감각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다. 인간들은 감각이 주는 쾌감에 도취되어 살아가고 감각이 주는 정보에 의지하여 판단하지만, 감각적 쾌락은 덧없고 위험하며 감각이 주는 정보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게 그 메시지일 것이다. 바퀴 뒤에 서 있는 국왕은 이러한 감각의 위험한 움직임을 통제할 존재, 곧 이성이나 그에 상응하는 인식기관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예술사가가 해석한 그림의 의미였다.

사진2. 배로 표현된 교회. 이어제 수도원 교회. 1724~25년. 위키커먼스 제공
문제는 필자에게 이러한 설명이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자의 눈에 비친 롱소프의 왕과 바퀴, 다섯 감각의 그림은 운명의 여신을 주제로 한 이전의 어떤 이미지들과도 닮지 않았다. 필자는 나름대로 가설을 세웠다. 처음에는 앞에 놓인 바퀴가 배의 키를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상징체계에서 교회는 구원의 시간을 향해 험한 바다를 헤치며 나아가는 방주 또는 배로 상징화되곤 했다. 마침 적절한 예가 하나 있다. 지난해 2월 독일의 고중세 독일문학 연구자들이 중세의 우화를 주제로 연 학술회의에 연사로 불려가 슈바벤 지방의 이어제(Irsee) 수도원에서 며칠 머문 일이 있다. 그때 수도원에 딸린 교회에서 배 모양의 설교단을 발견했다.(사진 2) 부푼 돛은 배가 구원을 향한 항해에 나섰음을 말한다. 그 돛은 천사들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배의 앞부분에는 대천사 미카엘의 상이 보인다. 미카엘은 악을 징벌하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검을 든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왼손에는 ‘Quis ut Deus’(미카엘이라는 히브리어의 라틴어 번역)라는 글자가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다. 여기서 구원을 향해 항해하는 배라는 메타포는 교회를 가리킨다.

중세의 정치사상에서 배는 국가의 상징이기도 했다. 정부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거번먼트(government)는 키를 잡고 배를 조종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구베르나레(gubernare)에서 온 말이다. 그렇다면 롱소프 벽화에서 키를 잡고 있는 국왕의 모습은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를 의미하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전율은 이내 “섣부른 흥분은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교훈으로 바뀌고 말았다. 며칠 동안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가며 선박의 역사를 연구하고서 우리가 <보물섬> 같은 소설이나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영화에서 보는 둥그런 바퀴 모양의 키는 14세기에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림 속의 바퀴는 배의 키일 수는 없다.

우주의 규칙 담은 구, 원, 바퀴

운터덴린덴에 있는 베를린 제1국립도서관 고서적실에서의 시간이 흘러갔다. 지금은 재건축되어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당시의 제1국립도서관은 미로 같은 복도가 이리저리 얽히고 여기저기 부서진 낡은 건물이었다. 그중에서도 고서적실은 20세기 초반 풍의 탁자에 골동품상에서나 볼 수 있는 램프(정말 옛날 느낌이 물씬 나는 ‘램프’!)가 희미하게 빛을 뿜는, <해리 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촬영지로도 딱 어울릴 곳이었다. 바퀴의 상징에 대해 힌트가 될 만한 글은 신학이든 우주학이든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손에 닿는 대로 읽었다. 어떤 책은 필자에 앞서 대출한 이가 거의 150년 전에 한 사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선배 대출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읽었다.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라도 뭔가 잡히는 부분은 유일하게 휴대가 허락된 연필로 노트에 적었다.

고서적실에서 몇 주를 지낸 뒤,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오늘날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16세기까지 바퀴의 메타포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우주의 규칙성과 완전성이었다. 앞서 7회, 15회 연재에서 구와 원이 우주적 질서를 표현하기 위한 메타포로 쓰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바퀴는 종종 그러한 원과 구의 상징적 대체물이었다. 고서적실에서 손에 쥔 것은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문헌자료들이었다.

이 자료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다만 롱소프의 왕과 바퀴, 그리고 다섯 감각의 벽화를 해석하려고 했던 이전의 예술사가들이 몰라서든 혹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바퀴의 이런 의미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만일 롱소프의 바퀴가 운명의 여신이 돌리는 변덕과 무질서의 바퀴가 아니라 질서와 완전성의 바퀴라면 전체 그림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왜 다섯 감각의 상징이 바퀴 주변에 늘어세워져 있으며, 왕은 왜 유독 거미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 뒤에 세워진 왕은 누구이며 왜 바퀴는 그의 몸 위에 겹쳐져 있을까? 질문은 새로운 길, 이전에 누구도 가본 적이 없거나 갔다가 되돌아왔을 길로 들어섰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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