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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3 05:01 수정 : 2020.01.0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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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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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노이의 불평>(1969)은 필립 로스의 ‘사고작’이다. 데뷔작 <굿바이 콜럼버스>로 이미 전미도서상을 수상했지만 정작 필립 로스란 이름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는 건 그에게 명성과 함께 오명까지 안겨준 이 책이 출간되면서다. 일종의 대형사고라고 할까. 미국문학사에 필립 로스라는 브랜드의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포트노이의 불평’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제목은 작품에서 중의적이다. 주인공 앨릭잰더 포트노이의 이름을 딴 의학적 질환의 이름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포트노이증’이라고 옮겨졌다. 흔히 쓰는 방식대로라면 ‘포트노이 콤플렉스’라고도 부름 직하다. 소설은 주인공이 정신과의사 슈필포겔에게 자기의 과거를 토로하는 긴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슈필포겔이 지어낸 병명이 바로 포트노이 콤플렉스다. 사전 형식의 정의에 따르면 “강력한 윤리적, 이타주의적 충동들이 종종 도착적 성격을 띠는 극도의 성적 갈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도덕적 충동이 어떤 종류의 성적 만족도 좌절시키는 질환으로 대개는 어머니와 자식의 결속관계에 그 원인이 있다는 설명이 제시된다.

포트노이는 작가 로스와 마찬가지로 1933년생의 유대인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삼십대 중반의 엘리트 변호사로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이어야 할 것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정신과의 카우치에서 그가 토로하는 인생 이야기는 좌절과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 빈민 지역의 보험외판원인 아버지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승진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 분노와 좌절감 때문에 변비에 시달린다.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터졌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에도 어쩌면 변비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위인이다. 가정에 헌신적이지만 정작 가장으로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하는 인물은 어머니다. 결벽증적인 어머니는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인 포트노이를 매번 잔소리와 협박으로 주눅들게 한다. 누나를 똥이라고 불렀다고 아들의 입을 세탁비누로 닦아내고, 밤참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아직 예닐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게 긴 빵칼을 들이밀며 위협한다. 포트노이에게 어머니는 규제와 금지의 화신이어서 처음 학교에 갔을 때 교사들이 모두 변장한 어머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의 울분은 이렇다. “아버지가 어머니이기만 했다면!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이고!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왜 성별이 다 바뀌었는지!”

포트노이는 일찌감치 자위행위에 빠진다. 기행에 가까운 그의 자위행위는 뒤바뀐 오이디푸스적 가족관계 속에서 포트노이가 자기 존재감과 정체성을 얻기 위해서 벌이는 고투의 의미를 갖는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강한 남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의사 슈필포겔에게 호소한다. “선생님,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벌벌 떨며 사는 건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남자가 되게 해주세요! 용감하게 만들어주세요!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온전하게 만들어주세요!”

그러나 포트노이의 고투는 끝내 실현되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거부하지만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데는 실패한다. 포트노이에게서, 그리고 작가 로스에게서 새로운 정체성이란 미국인이고, 이제 그는 미국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단계로 나아간다. 필립 로스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될 <미국의 목가>(1997)를 비롯한 ‘미국 삼부작’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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