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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7 09:38 수정 : 2019.12.27 20:48

[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책과 열쇠의 계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2019)

처음 추리소설을 썼을 때, 출판 마케팅 전문가인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왜 굳이 일상 추리소설이라고 밝혔어요? 한국에서는 일상 추리 독자가 없는데.” 물론 나는 의아했다. 홍시 맛이 나니까 홍시라고 하듯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수께끼를 다뤘으니까 일상 추리라고 했을 뿐인데, 정체를 숨겨야 팔릴 정도로 일상 추리는 국내에서 망한 장르였단 말인가? 미스터리 소설의 검은 양이라도 된단 말인가?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내 소설이 좋은 예는 못 된다고 해도,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과 열쇠의 계절>처럼 선전하는 일상 추리소설도 있으니까. 작가가 <고전부>와 <소시민> 시리즈로 인기를 끈 덕도 있겠지만, 고등학교 도서실을 배경으로 하는 새 책도 한국 독자들에게 잔잔한 반응을 일으키는 듯하다.

책이 유튜브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 <책과 열쇠의 계절>에는 한적한 도서실을 지키는 두 명의 도서위원이 나온다. 키가 훤칠한 마쓰쿠라 시몬은 운동부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어째서 도서관을 지키고 있는지 영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소설의 화자인 호리카와 지로는 언뜻 보기엔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마음 약한 성격 같지만, 실은 사물을 꿰뚫어 보고도 모른 척해주는 배려가 있다.

의뢰인들은 처음에는 명료해 보이는 사건을 의뢰하러 도서실에 온다. 할아버지의 유품이 들어 있는 금고 번호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거나 시험지를 훔쳤다는 누명을 쓴 형의 알리바이를 찾아달라거나 자살한 친구가 쓴 유서가 든 책을 찾아달라는 일들이다. 하지만 사건 뒤에는 반드시 엇갈린 입장들이 있다. 솔직하지 못한 의도가 있다.

주인공들도 보통 학원물 속 전형적 고등학생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냉소적인 마쓰쿠라는 남에게서 최악의 모습을 추측하고, 선한 일을 할 때도 그 동기가 선명하지 않다. 반면 호리카와는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듯하지만, 타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어릴 적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굳이 먼저 말하지 않을 뿐이다. 선도, 악도 완전히 가르지 않는 이 고교생 탐정 콤비는 인간의 태연한 얼굴 아래 숨겨진 욕망을 들여다본다.

보통 일상 추리는 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수수께끼를 다루기에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동시에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철학적 깊이가 있다.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 아래 깊은 곳에서는 소용돌이 같은 사건들이 늘 일어난다. 그렇다고 해도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충격적인 범죄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은 매번 작은 사건들로 방향을 바꾸고 만다. <책과 열쇠의 계절>은 청춘에는 아름답게 흩날리는 꽃잎뿐만 아니라, 씁쓸한 환멸도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무리 인기 없다고 해도 내가 이 장르의 성실한 팬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일상 추리는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을 믿으면서도 어두움을 보고, 남을 믿으면서도 의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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