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0 06:01
수정 : 2019.12.20 09:56
‘쇠귀’ 신영복의 삶과 사상, 저술활동 등 일목요연하게 정리
동서양 고전과 실천을 융합한 ‘성찰적 관계론’ 풍부한 해설도
신영복 평전-더불어 숲으로 가는 길
최영묵·김창남 지음/돌베개·1만9500원
“가능한 선생의 입장에서” “그저 선생이 남긴 글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라는 취지에 딱 맞게, 이 책의 장점은 ‘정리력’이다. 그런데, ‘이미 다 있는 것’을 정리했을 뿐인데, 기억은 자꾸 ‘발견’된다. 세월 속에 잊혀져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의 삶과 말이 뛰쳐나온다.
스승이 사라진 시대가 애달파서 스승이 사라진 자리가 더욱 허한데, 스승이 남겨놓은 향기는 너무 맑다. 신영복(1941~2016) 4주기를 앞두고 그와 함께 일했던 성공회대 동료 교수 최영묵·김창남이 펴낸 <신영복 평전>은 그 향기를 농축시켜 ‘쇠귀’(신영복의 아호)의 깊은 세계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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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의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태어나 나고 자라 서생(대학원생)으로 살았던 전반기 27년이 “누군가에 의해 닦여진 길”을 걸어간 “심부름 인생”이었다면, 사형수-무기수 20년은 “형극의 길”이었으며, 후반부 27년은 성공회대를 거점으로 수많은 도반과 ‘더불어 숲’을 일군 시간이었다.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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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삶은 통혁당 사건으로 징역을 산 20년(1968~88)을 앞뒤로 데칼코마니처럼 딱 27년씩 접힌다. 교장의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나고 자라 서생(대학원생)으로 살았던 전반기 27년이 “누군가에 의해 닦여진 길”을 걸어간 “심부름 인생”이었다면, 사형수-무기수 20년은 “형극의 길”이었으며, 후반부 27년은 성공회대를 거점으로 수많은 도반과 ‘더불어 숲’을 일군 시간이었다. 이 책은 신영복의 인생을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따라가며 그의 성정을 이룬 가풍과 각종 일화와 기록을 소개하고, 쇠귀의 사상과 그의 다양한 저술활동을 요령 있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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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상고 시절 가장행렬 경연에서 친구들과 함께(가운데).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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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묘사한 신영복의 품성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밀양초등학교 학적부에 “쾌활 명랑하고 잘 웃긴다” “예의적 방면이 깊다” “언어가 명료하다”는 등의 평가가 남아 있을 만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려 깊은 명랑소년이었다. 대학 시절 입주가정교사로 있을 당시 ‘회장님댁’의 문맹인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들을 위해 정성 들여 대신 편지를 써줬고, 죽음이 어른거리는 사형수 신분일 때조차 ‘빽’도 돈도 없는 동료 수감자를 위해 항소이유서를 대필해줬다. ‘선비’였지만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감옥에서 재소자들과 즐겼던 ‘땅탁구’(땅에서 하는 탁구)를 성공회대에 보급했고, 수요일마다 동료 교수들과 공을 찼다. 그는 아트사커(프랑스), 토탈사커(네덜란드)에 빗대 성공회대 축구의 ‘이념’을 ‘모랄사커’로 규정했는데, 그에게 축구의 ‘모랄’이란 경기가 끝난 ‘뒤’의 관계를 생각하는 감각이었다. 흥이 오르면 1950년대 유행곡인 <엘레나가 된 순이>를 즐겨 부르는 신영복을 가리켜 김창남은 “유치할 줄도 아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암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도, 지인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마비가 다리 쪽부터 위로 올라오고 있어요. 이제 가슴까지 왔네. 얼마나 다행이야. 위에서부터 내려오지 않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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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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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대학 은사이자 구명운동에 힘썼던 변형윤 교수가 제자의 출감 직후인 1988년에 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판기념회에서 “우리는 20년 전에 한 사람의 뛰어난 경제학자를 잃었지만 20년이 지난 오늘 위대한 사상가를 얻었다”고 밝힌 것처럼, 쇠귀는 옥중에서 고전을 다독하고 ‘밑바닥 재소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자신만의 철학 세계를 일궜다. “공자의 집에 살다 마르크스의 세상으로 가서 큰 곤욕을 치르고 노자의 자연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한국근현대역사 연구, 동양고전의 지혜가 담긴 그의 사상적 기반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바, 이는 ‘성찰적 관계론’으로 수렴된다. 대부분의 사상범은 독방에 홀로 앉아 독서하는 게 ‘남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는 기꺼이 공장에 출역해 페인트·도장·영선·재봉 등 갖가지 기술을 익히며 재소자들과 우정을 나눈다. 그는 “사상이 삶의 현실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관념화, 물신화”이며 “나는 내가 겪은 사람과 일의 집합”이라고 생각했다. 또 “개인의 삶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즉 ‘시대의 양’이 사상을 평가하는 중요 기준”이라며 역사의 현재성을 잊지 않았다. 관계론은 휴머니즘과 통한다. 그는 “고기를 잡았거든 망태기는 버려라”(<장자>)라는 말을 “고기를 버리고 그물을 만들어라”로 고쳐 말했는데, “고기라는 사물은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없지만 모든 사물과 사건과 모든 사태가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조했다. “나무는 낙락장송이나 천하의 명목이 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룸으로써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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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성공회 신학대학에서 강의하는 모습.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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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 이 시대의 ‘사표’(師表)였지만 스스로 내세우지 않았다. “사표는 당대 사회엔 없는 것이다. 연암이고 다산이고 당대엔 모두 죄인이었다. 사표와 스승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스승이 훌륭한 게 아니다. 좋은 스승을 가진 사람이 훌륭한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누군가의 제자이자 동시에 스승이며 배우고 가르치는 사제의 연쇄를 확인하는 것이 곧 자기 발견이다.”
무엇보다도, 무한경쟁 속에서 무한좌절을 느끼는 외로운 젊은이들에게 신영복의 당부가 긴급히 가 닿으면 좋겠다.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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