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기 투쟁 그린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작가 어머니 이야기
국가와 가족 아무도 몰랐던 그의 왼팔…‘역사의 주인공’ 뒤안길 삶 그려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그림, 송민주 옮김/길찾기·1만5000원 “그럼 당신 어머니는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아나키스트였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을 소개하던 자리에서 작가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구석자리 한 부인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09년 출간돼 스페인에서 온갖 상을 휩쓸며 찬사를 받은 뒤 한국에도 소개된 아버지의 생애사에서 어머니는 자기 서사가 전혀 없는 말 없는 조연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작가는 어머니의 삶을 쫓기 시작했다. <부러진 날개>는 그렇게 6년여 어머니의 자취를 쫓아서 그래픽노블로 재구성해 낸 어머니의 일대기다.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다.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간 아들은 간호사로부터 어머니가 왼쪽 팔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오른쪽 팔에만 링거 주사를 놓을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어머니에게 “언제부터 왼쪽 팔이 이렇게 됐냐”고 묻자 어머니는 “늘 그랬다”고 답한다.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랫동안 어머니와 별거 중이던 아버지를 찾아가 묻는다. “어머니가 왼팔을 쓰실 수 없단 걸 아셨어요?” 아버지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전혀 몰랐다”고 답한다. 평생 왼팔을 쓰지 못한다는 걸 남편도 아들도 모를 정도로 침묵 속에서 살아온 어머니는 사진만 12장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지은이는 어머니가 단편적으로 내뱉었던 말들을 기억 속에서 길어 올리고 살아있는 외가 가족들과 어머니의 얼마 되지 않는 친구들을 만나고 추측을 더해 이 책을 완성했다. 1910년대 스페인의 가난한 시골 지역에서 사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어머니 페트라. 페트라를 낳던 외할머니는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외할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페트라를 죽이려 한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돌로 내려찧으려는 과정에서 페트라는 팔이 부서져 평생 못 쓰게 됐다. 친언니가 페트라를 데리고 도망쳐서 근처 이모 집에서 몇 년을 키운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남자 형제들과 달리 집안일을 떠맡은 페트라는 언니 오빠들이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뿔뿔이 집을 떠난 뒤에도 집에 남는다. 척추 부상과 알코올중독으로 걷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먹이고 씻기며 8년간 시중을 들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집밖으로 나오게 된 페트라. 친구의 소개로 고향을 떠나 대도시 사라고사의 후안 바티스타 총사령관 집의 가정부로 취직한다. 왕정복고주의자로 프랑코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후안 바티스타 집에선 비밀회담이 잦았던 탓에 페트라의 첫 번째 의무는 비밀유지와 침묵이었다. 성실성과 무거운 입으로 총사령관 부부의 총애를 받았지만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그는 일을 그만둔다. 아들을 낳고 사기를 당해 길거리에 나앉게 되고 부부불화를 겪은 뒤 남편에게 버림받은 페트라는 말년을 양로원에서 마무리한다. 이 책은 내전과 프랑코 파시즘 정권을 거치면서 극심한 좌우파 대립을 겪던 근대 스페인의 격동기 속에 부엌데기, 가정부, 아내로 살아온 한 여성의 생존기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친아버지로부터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던 그녀는 도처에 널린 죽음과 폭력, 성차별과 성폭력에 신앙심과 침묵을 무기로 생존해냈다. 아버지와 형제, 남편이 공화주의자, 왕정복고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이름으로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는 동안 말이다. 평생을 희생자로만 살았던 당대 여성들에게 익명성은 숙명이었다. 이 책은 뒤늦게나마 그 여성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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