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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3 06:02 수정 : 2019.12.13 09:55

전세계 독자들 매혹시킨 원작에 100여개 도판 등 담아
첫 프랑스판 냈던 갈리마르 출판사의 2013년 버전 번역

 ‘어린 왕자’ 출간 70주년 기념 갈리마르 에디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정장진 옮김/문예출판사·2만2000원

문예출판사가 우리말로 출간한 <어린 왕자 출간 70주년 기념 갈리마르 에디션> 겉표지.

‘어린 왕자’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자꾸 말로 설명하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라는, 한 프랑스 작가의 말은 온당하다. 어린 왕자에게 이미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 독자들을 향해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치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죄를 짓는 용기를 내보자. 어린 왕자는 누구인지, 어린 왕자는 어디서 왔는지, 어린 왕자의 ‘지구인 버전’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생텍스)는 누구인지, 그리고 어린 왕자는 왜 이토록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지.

<어린 왕자>가 1943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래, 이 작품은 세계 250여개 언어로 옮겨졌다. 한국에서도 1960년 안응렬의 번역 이래 국내 400여개 출판사가 다양한 <어린 왕자> 버전을 내놓았다. 1973년 문학평론가 김현의 번역본을 냈던 문예출판사가 내년 생텍스 탄생 120년을 코앞에 두고 ‘어린 왕자’의 안과 밖을 아우르는 책을 냈다. 프랑스어판 초판본(1946년)을 냈던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가 지난 2013년 발간한 <어린 왕자 출간 70주년 기념 에디션>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프랑스문학 전공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정장진이 번역 외에도 풍부한 주석을 달아 이해를 도왔다. 책 자체도 인상적인 물성을 지녔다. 부드러운데도 손톱자국이 잘 나지 않는 벨벳 스킨 코팅 기법으로 새파란 표지를 처리해, 삽화 속 어린 왕자가 입었던 코트의 촉감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책은 <어린 왕자> 전문에 덧붙여 개인과 도서관들이 소장하고 있는 100여개의 도판과 생텍쥐페리가 쓴 편지, 그를 회고하는 가까운 지인들의 말과 글, 출판물에선 빠졌던 미완성 원고를 담았다. 생텍쥐페리 전공자들이 <어린 왕자>의 탄생 배경과 상징적 의미 등을 분석한 글도 실었다. 문예출판사의 <어린 왕자>를 바탕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죄를 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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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는 누구인가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 삽화를 직접 그리기로 마음 먹고 수채화 물감 등을 사들였다. 미국 사진기자 존 필립스가 어느날 어린 왕자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었냐고 물었다. 생텍스는 ‘어느날 흰 종이 한 장을 앞에 놓고 가만히 쳐다보았더니 어린 아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답했다. “‘넌 대체 누구니?’ 그랬더니 그 아이가 ‘난 어린 왕자야’라고 답했어.” 어린 왕자가 어느날 갑자기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에게 나타났듯이, 생텍스에게도 어린 왕자는 느닷없이 출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어린 왕자는 생텍스의 유년 시절부터 혹성 B612호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있다. 누나이자 고문헌학자인 시몬은 “어릴 때 앙투안이 써서 보냈던 편지들에 등장하는 캐리커처들이 변신해서 이 책에 다시 나타나 있었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이라는 마술에 걸려 작은 혹성에서 흠뻑 취해 살았던 앙투안의 모든 기억이 집약된 작품”이라고 증언한다. 시몬은 “책을 보니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다시 돌아와 위험을 무릅쓰고 고된 일을 하는 조종사를 만나고 있었다”고 전한다. 어린 왕자가 곧 생텍스라는 증거는 많다. 생텍스는 1935년 파리-사이공을 오가는 비행기를 몰다 리비아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가 겨우 살아남았다. 조종사와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만난 건 ‘필연적 상상’에 가깝다. 어린 왕자가 돌보았던 화산 역시 아내 콘수엘로의 고향 중남미 엘살바도르의 화산을 연상케 한다. 생텍스는 1943~44년 흠모하는 한 여성을 염두에 두고 ‘이름 모를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그는 편지를 끝맺을 때마다 머플러가 바람에 휘날리는 어린 왕자의 모습을 그려넣고 서명을 했다. 어린 왕자와 생텍스를 떼어놓고 볼 수 없기에, 어린 왕자가 뱀에 물려 ‘고향 혹성’으로 가는 장면은 이후 비행기 사고로 지구를 떠난 생텍스의 삶과 겹친다. <어린 왕자>가 생텍스의 ‘유서’라고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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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스는 누구인가

프랑스 리옹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생텍스는 1920년 공군에 입대했고, 1926년부터 우편조종사로 일했다. 유년시절 낡은 저택과 정원에서 뛰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네살 때 아버지를, 열일곱살에 남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후일 앙드레 말로의 연인이기도 했던 여성 작가 루이즈 드 빌모랭과 1923년 파혼한 것도 그의 영혼에 깊은 우울감을 남겼다고 전한다. 생텍스는 프랑스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어린 왕자>를 비롯해 <남방 우편기> <전시 조종사> 등 대부분의 작품을 프랑스 영토 밖에서 썼다. 영어에 영 서툴렀는데도, 미국은 생텍스를 무척 사랑했다. 두번째 소설 <야간 비행>은 소개되자마자 바로 클라크 게이블이 출연하는 영화로 제작됐으며, 그가 나치의 프랑스 점령을 피해 1941년 뉴욕에 도착하자 많은 미국인 친구들이 그를 환대했다.

하지만 그는 유배당한 외국인으로서의 비애감에 젖어 있었고,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에 두고 온 친구와 가족을 그리워했다. 애초 <어린 왕자>를 아내 콘수엘로에게 헌정할 예정이었지만 마음을 바꿔, 프랑스에 남아 고초를 받던 유대인 좌파지식인이자 절친한 친구인 레옹 베르트에게 바쳤다. <어린 왕자>를 본격적으로 집필했던 1942년 생텍스 부부는 롱아일랜드 근교의 큰 저택에서 생활했는데, 실제로 이들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장미가 아내를 상징한다는 해석도 많다. 생텍스는 아내와 별도로, 미국에서 여러 여인들과 사귀었다. <어린 왕자> 속 양의 이미지는 한때 연인이었던 실비아 해밀턴이 기르던 푸들 강아지에서 따왔다고 추정된다. 생텍스는 <어린 왕자>가 출간될 무렵인 1943년 4월 징집 명령을 받고 알제리행 수송선에 올랐다. 생텍스가 생전에 <어린 왕자> 출간을 봤는지 여부는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 4월6일 <뉴욕타임스>는 ‘오늘 출간된 책들’에 <어린 왕자> 서평을 실었는데, 이때 이미 북아프리카로 떠났다는 얘기도 있고, 판매용이 공식 인쇄되기 이전에 찍은 책들을 들고 수송선에 올랐다는 증언도 있다. 확실한 것은 <어린 왕자>가 혹시 오독될까봐 전전긍긍했던 생텍스가 <어린 왕자>의 성공을 직접 지켜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린 왕자 출간 70주년 기념 갈리마르 에디션>에 실린 생텍쥐페리의 데생과 수채화들. 그는 <이름 모를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1943~1944)에 어린 왕자의 그림을 그렸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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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사랑은 왜 이리 여전한가

생텍스의 친구들이 보관하고 있는 프랑스어판 교정쇄를 보면 작품 제목에 쓰여 있는 글자체가 지금 독자들에게 익숙한,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활자체가 아니라 딱딱한 고전적 글자체인 ‘엘제비리엔’이다. 즉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로 출간할지, 성인용 우화로 출간할지, 출판 마케팅에서 ‘포지션 선정’을 위해 막판까지 고심했다는 의미다. 특히 출판사 사람들은 어린 왕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이 어린이용 줄거리에 부적절하다고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린 왕자>는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의 압도적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설명해주는 ‘길들임’의 의미는, 사랑의 본질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최고의 잠언이랄 수 있다. 자제력을 발휘해서, 명문 딱 하나만 골라본다.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다가올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나는 벌써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거야. 그러면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알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몇시에 곱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의례가 필요한 거야.”

사물을 투과해 인생의 본질을 일러주는 X선, 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손가락, 샘을 감추고 있는 아름다운 사막,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의 우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길어올리는 도르래…. 아, 헛되다. 어린 왕자에게 이런 표현을 덧붙이는 것, 헛되다. 인류가 문자와 그림을 이해하는 한, 어린 왕자는 영원할 텐데.

생텍쥐페리가 친구에게 바친 헌사

레옹 베르트에게

나는 이 책을 어른에게 바친 데 대해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물론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하나 있다. 이 어른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인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이 어른이 모든 걸,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까지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이유도 있는데, 지금 프랑스에 사는 이 어른이 굶주리고 추위에 떤다는 것이다. 그는 위로받아야 할 처지다. 그래도 이 모든 이유가 다 부족하다면 이 어른이 아니라 옛날 어린 시절의 그에게 이 책을 바치기로 하겠다.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면 이제 이 헌사를 다음과 같이 고쳐 써야겠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의 레옹 베르트에게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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