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유연한 결합 ‘실용적 이중주의’ 강조
혼자 문제 떠안는 ‘생존가치’ 강한 한국 공공성 제고 방안도
북유럽의 공공가치
최희경 지음/한길사·4만5000원
북유럽은 지구상에서 공공성 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다. <북유럽의 공공가치>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의료정책과 교육정책을 중심에 놓고 각각의 모형을 섬세하게 다룬다. 그 나라 사람들이 해당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고 습득하고 경험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가는지를 연구한 것인데, 북유럽 정책에 대한 관심만큼 연구는 드문 한국에서 만나기 힘든 현장 연구서다. 최희경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는 10년간 북유럽을 오가며 문헌을 수집하고 전문가와 일반 시민들을 심층면담, 관찰했다. 832쪽에 이르는 두꺼운 학술서임에도 생생한 사례와 ‘현장’ 목소리 덕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책은 각국의 역사와 전통을 검토하고 노동조건과 사회여건, 공공가치의 수준 등을 설명한다. 특히 공공가치를 ‘개인가치’와 ‘사회가치’의 틀로 분석하는데 개인가치는 자율성, 독립, 자아표현, 자유, 자유주의, 세속적·합리적 가치를 중요 속성으로 가지며 사회가치는 연대성, 공동체의식, 참여, 협력, 평등, 보편주의, 만민평등주의, 관용, 신뢰 같은 특성을 갖는다.
각 나라의 상황을 보면, 노르웨이는 산유국이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수익금 대부분을 쌓아 현 세대는 높은 세금을 내고 살아간다. 응답자들은 “납세는 이 제도의 주인으로서 내가 내고 감당하는 것” “시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등의 답을 내놨다. “왕도 공공의료기관에서 순서를 기다린다“는 노르웨이의 평등한 의료제도는 시민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교육 전반의 공공성이 스칸디나비아 삼국 중에서도 노르웨이가 가장 높은데, 이 나라 사람들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다방면의 수준 있는 문헌을 많이 읽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회가치는 교육의 핵심이고 개인가치보다 더 중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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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노동자들은 상당히 자연스럽게 정치적 주체가 되었고 튼튼한 시민사회 틀 안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왔다. 사진은 2012년 7월 스웨덴 고틀란드 섬의 주도 비스뷔에서 열린 알메달렌 정치박람회.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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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스웨덴의 복지체계를 상징하는 표어는 ‘국민의 집’이다. 1766년 언론자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 나라는 자율과 독립이라는 개인가치를 강조하는 사회 전통을 가졌다. <삐삐 롱스타킹>이 자율성과 독립성의 상징이라면 국민만화 <밤세>는 공동체의식과 연대성의 상징이다. 힘센 곰 밤세가 숲에서 친구들과 함께 문제를 헤쳐나가는 내용으로 인종주의, 집단괴롭힘, 성차별 등 주제를 다뤘다. 스웨덴 사람들은 웬만한 일로 병원을 잘 가지 않으며 운동과 휴식을 통한 자연치유를 선호한다. 교육은 노르웨이와 동일하게 대학을 빼면 100% 공공예산으로 충당한다.
인구 570만명의 덴마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약 두배로 고용률이 높고 소득분포가 스칸디나비아 삼국 가운데 가장 평등하다. 지은이와 만난 덴마크 사람들은 조세회피적 사고를 비판하며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개인의 자율과 독립을 중시해 2016~17년 여러 단체가 공동으로 ‘진정한 덴마크 가족’을 찾는 프로젝트를 실시했는데 동거 커플, 동성혼가족 등을 포함해 총 37개 유형의 가족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재정의 85%가 공공예산이며 일차의료기관 등의 병원 비용은 무료다. 진단과 치료가 사회 공동책임이란 개념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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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유아원의 아이들이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놀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이들은 야외 활동을 한다. 잦은 활동으로 인한 지저분한 실용복은 북유럽 아이들의 일상적인 차림새다. 지은이는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가 넘는 나라로서는 믿기 어려운 모습”이라고 적었다.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도 가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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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발견한 북유럽 공공가치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가치와 사회가치가 견고하게 결합하여 있다는 것이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상당히 자연스럽게 정치적 주체가 되었고 튼튼한 시민사회 틀 안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왔다. 한국이 시민사회의 형성에 앞서 국가주도 경제 발전이 우선했고 시장제도의 한 주체로서 ‘소비자’가 우선 정착해 사회적·정치적 존재로서 ‘시민’이 그 뒤에 출현했다면, 북유럽은 ‘소비자’란 개념보다 ‘주민’ ‘시민’ 개념이 선행했다. 한국과 달리 경제 활성화도 시장과 정부의 대립이란 이분법보다 전체 공동체의 측면에서 보는 인식이 강하다. 예컨대 스웨덴의 경우 친환경소비정책을 일관되게 실시해 가정폐기물의 99%를 재생, 재활용하고 매립량은 1%에 불과하다. 2014년 스웨덴 환경보호청은 20억원을 들여 스웨덴 사람들의 소비가 국내외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작업을 시작해 2018년 최종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소비를 자제하고 절약하여 자연을 보존하며 나눔과 돌봄을 증진하면서 연대성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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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칠해진 인어공주. 2017년 5월30일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동상이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 발견되었다. 고래잡이 반대 메시지가 함께 남겨져 있었다. 코펜하겐의 공식 문화 관광안내책자는 이를 표지사진으로 사용했다. 덴마크가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국가임을 홍보하며 동시에 시위대 주장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2017년 8~10월호 표지.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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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교육목표는 개개인이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고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등을 중시하는 보편주의와 관용의 가치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이 나라들은 15살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피사(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피악(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 더 우수한 결과를 보인다. 고등학교까지는 경쟁을 지양하고 기초역량을 다지도록 한 북유럽 교육의 지향점을 반영한 결과인 셈이다. 무상교육은 시민들의 오랜 지지를 받아왔으며 응답자 대부분이 공공교육의 품질이 민간교육 못지않음을 강조했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평등한 교육기회의 제공, 사회적 차별의 최소화, 보편주의 교육철학이라는 전통가치가 계속 강조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민학생이 많아지면서 ‘모두를 위한 학교’에 회의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여전히 평등, 연대성, 개인의 해방을 강조한 민주적 진보주의 사상이라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의료제도에서는 세대를 불문하고 응답자들 대부분이 의료서비스를 필수공공재로 보았다. 본인 또는 가족, 지인의 수술이나 진료를 경험하면서 사회 전체가 의료서비스를 공평하게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 북유럽 의료의 최우선 순위는 중증·응급환자들이고 경증·일반질환은 길게는 몇달까지 전문의를 기다려야 하지만 한국과 달리 의료진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
지은이가 심층면접한 북유럽 사람들은 정책에 냉소적이거나 겸양을 섞으면서도 그만큼 또 자부심이 가득한 답변을 내놓았는데 이 목소리 하나하나가 흥미롭다. 하지만 정말 주의깊게 읽게 되는 지점은 한국과 비교한 시사점 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북유럽의 개인주의와 달리 ‘생존가치’가 매우 높게 나타난다. ‘생존가치’는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기반하는데, 그 탓에 때론 합리주의를 밀어낸다. 타인과 정책에 대한 신뢰가 낮아 개인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할 때 사회와 국가가 도와주리라는 믿음이 없으면 스스로를 지키려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데, 그 수단이 항상 정당하고 적법하긴 힘들어 제도와 정책을 회피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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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한 가정에서 1973년부터 수집한 국민만화 <밤세>. 아빠가 보던 만화를 지금은 네살 딸이 즐겨 본다고 한다. 곰을 주인공으로, 숲속 동물들이 공동체에 필요한 규범과 가치를 전하며 사회문제를 고민할 수 있도록 한다. 최근 한 일화는 ‘가짜뉴스’를 다루기도 했다고 한다.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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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것 못지않게 시민 개개인의 책임과 자율성도 중요하다고 책은 강조한다. 위기 때마다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정당, 세력 간 극적인 타협을 이뤄낸 북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참조하여 실용주의를 우위에 두고 전략적으로 제휴하고 타협하는 정치와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도 조언한다. “북유럽 의료재정의 85%, 교육재정(교육기관 지출 기준)의 97%를 정부가 부담한다는 점은 더없이 중요한 대목”이라고 지은이는 밝혔다. 12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최희경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가 고려하고 바라봐야 할 또 다른 모형으로서 북유럽이 중요하다”며 “정치가 아닌 정책에 대한 정부의 충실한 설명과 책임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복잡한 상황일수록 정책의 핵심을 바라보고, 국민들도 근본적인 것에 대해 논의할 줄 아는 성숙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불필요한 진영 논쟁과 대립을 떠나 궁극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을 볼 때도, 치밀한 현장 연구서이자 냉정하고 합리적인 정책참고서로 널리 읽힐 만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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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코펜하겐대학 국립병원 본관의 작은 도서관 전경. 북유럽은 오늘날 독서에 관한 한 국제지표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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