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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3 05:59 수정 : 2019.12.13 10:04

1980년대 야학 ‘시정의 배움터’ 강학으로 활동한 사진작가 전경숙이 봉제노동자 홍경애가 작업하는 손을 찍어 광목천에 프린트한 사진 위에 홍경애가 자신의 미싱(재봉틀)으로 장식을 했다. 전태일기념관 제공

전태일 50주기 전시 ‘시다의 꿈’
여성 봉제노동자들 삶 소설로 써
사진, 설치미술 등과 함께 전시

정세랑 최정화 조해진 이주란 참여
야학과 청계피복노조 활동 중심
“시다 향한 전태일의 마음 새기고자”

1980년대 야학 ‘시정의 배움터’ 강학으로 활동한 사진작가 전경숙이 봉제노동자 홍경애가 작업하는 손을 찍어 광목천에 프린트한 사진 위에 홍경애가 자신의 미싱(재봉틀)으로 장식을 했다. 전태일기념관 제공

‘시다’란 조수나 보조원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어 ‘시타’(下)에서 왔다. 도배를 할 때 먼저 바르는 밑종이 또는 밑종이를 붙이는 일을 뜻하는 ‘시타바리’(下張り)가 어원인데, 영화 등에서 종이나 심부름꾼의 뜻으로 종종 쓰이는 ‘시다바리’에 그 흔적이 보인다. 특히 지난 1970, 80년대에 수습 재봉사로 일한 이들을 ‘시다’로 통칭했는데, 노래로도 만들어진 박노해의 시 ‘시다의 꿈’이 그들의 고된 현실과 꿈을 그렸다.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박노해, ‘시다의 꿈’ 1·2연)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이 기획한 전시 ‘시다의 꿈’은 1980년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한 여성 봉제노동자 네 사람의 삶과 꿈을 사진과 소설, 미술 설치작품, 건축, 그래픽 디자인 등으로 꾸며 보여준다. 오는 20일부터 내년 3월29일까지 전태일기념관 1~3층에서 열리는 이 전시에는 특히 네 여성 봉제노동자 김경선·박경미·장경화·홍경애의 삶을 네 여성 작가 조해진·이주란·정세랑·최정화가 각각 단편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 나와 눈길을 끈다. 네 노동자는 80년대 당시 야학 ‘시정의 배움터’에 함께 다녔으며 청계피복노동조합에 속해 활동하며 “작은 전태일”을 꿈꾸었다.

정세랑의 소설 ‘태풍의 이름을 잊은 것처럼’은 노동자 장경화의 삶을 그렸다. 장경화는 “야학에 가면 가족보다도 잘해”준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야학에 발을 들여 놓는다. 야학에서는 상식을 배우고 시를 읽었으며 직접 쓴 시들로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 장경화는 무엇보다 시를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시를 읽는 시간에는 안쪽이 환해졌다.” 작업장에서는 전태일의 분신 이후 설치된 환풍기가 먼지와 지독한 원단 냄새를 빼주었다. “한 사람이 몸을 태워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가 잦아들지 않고 작용하는 힘으로 공룡 같은 도시 어딘가에 매일 부딪히고 울리는 소리를 냈다.” 장경화와 동료들은 2년 전 강제로 폐쇄된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을 점거하고 투쟁을 벌여 결국 사무실을 돌려받는다. 선배들처럼 창문 밖으로 투신하거나 유리로 몸을 긋고 사무실 집기를 불태우는 등의 격한 싸움을 각오했지만, 뜻밖에도 경찰은 순순히 물러났다. 장경화는 그것이 6·10 항쟁에 이은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시절은, 문집에 실린 글들과 연락처가 탄압의 빌미가 될까 봐 야학 문집을 하나도 빠짐 없이 불에 태워 없애야 할 정도로 엄혹하기도 한 무렵이었다. 그럼에도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시를 돌아보면서 장경화는 괴로움이 단지 괴로움만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괴로웠던 날들도 아주 괴로움으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 태풍의 이름을 잊었듯이.”

게다가 자신이 회사와 당국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 것은 힘들지언정 기계(‘미싱’)와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역시 나중에야 깨닫는다. “나는 정말로 이 일이 잘 맞았기 때문에 계속했다. 싸울 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계속하고 싶어서 싸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미싱사가 된 홍경애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사진작가 전경숙이 재촬영해 광목천에 인화한 작품 위에 홍경애가 자신의 재봉틀로 장식을 했다. 전태일기념관 제공

장경화 자신은 배운 기술로 엄마와 동생들에게 괜찮은 옷 한 벌씩을 지어 줄 정도로 살림도 피고 여유도 생겼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죽어 가는 또 다른 이 시대의 ‘시다’들이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도 “지하철 선로, 기차선로에서 끝없이 치이고 오물 가스에 질식하고 환풍기에 빨려들어가고 용광로에 빠지고 안전장치 없이 추락하고 백혈병에 걸리고 화상을 입고 실명하고 과로사 한다.” 이렇듯 나아진 것과 그대로인 것 사이에서 장경화는 다시 시를 생각한다.

“사라진 것과 사라지지 않은 것, 휘발된 것과 휘발되지 않는 것, 재가 된 것과 계속 타는 것에 대해 짚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러니 역시 다시 시를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최정화의 소설 ‘쑤안의 블라우스’의 주인공 홍경애는 “시다로 시작해서 미싱사가 되고, 객공으로 일하다 공장을 차”린 사장님이다. 그런 그의 공장에 어느 날 인력 센터의 소개를 받고 베트남 여성 노동자 쑤안이 찾아온다. 일을 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경험이 많지 않아 일손은 더디고 서투르기만 하다. 그런 그에게 차근차근 일을 가르치며 홍경애는 1979년 야학 ‘시정의 배움터’와 강학(교사)들을 생각한다. “그때 그 사람들은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고 왜 우리를 가르쳤을까.” 강학들을 좇아 쑤안에게 봉제 기술을 가르치는 홍경애의 행동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환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사흘 연속 홍경애의 공장에 찾아와 일을 배운 쑤안은 마침내 블라우스 한 벌을 완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사실 창신동 쪽방촌에 난 화재로 중태에 빠졌다가 사흘 만에 숨진 베트남 여성 노동자의 환영이었다는 사실은 소설 말미에 가서야 분명해진다. 조해진의 소설 ‘인터뷰’에서는 노동자 김경선이 일인칭 ‘나’로 나오고 그를 인터뷰하러 가는 소설가가 삼인칭 ‘그녀’로 등장한다. 인터뷰이가 관찰자가 되고 인터뷰어가 피관찰자가 되는 셈인데, 이런 시점 뒤집기는 인터뷰와 소설 쓰기로 이어지는 노동자와 소설가의 협업을 입체적으로 보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전시를 기획한 전태일기념관의 유현아 문화사업팀장은 “내년 전태일 50주기를 앞두고 전태일이 어린 여공들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하며 품었던 마음을 되살려 보고자 했다”며 “50주기를 알리는 이 전시를 시작으로 해서 노동 열사들과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조명하는 전시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여전히 봉제노동자로 일하는 장경화의 집 작업장을 사진작가 전경숙이 촬영하고 광목천에 인화한 작품 위에 장경화 자신이 재봉틀로 장식을 했다. 전태일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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