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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17 20:46 수정 : 2018.10.17 20:59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지난 추석 때는 모처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먹으며 티브이(TV)를 봤다. 마침 강하늘, 박서준 주연의 특집영화 <청년경찰>이 시작된 참이었다. 그런데 좀처럼 채널 선정에 관여하지 않던 여동생이 인트로가 끝나기도 전에 “저거 극장에서 봤어. 조선족에 대한 편견과 여성의 희생으로 웃음을 사는 영화야, 딴 거 봐”라며 채널을 휙 돌려 버렸다. 나는 뭘 잘못하지도 않았으면서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요즘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아아 나는 누군가에 대한 편견과 희생을 발판 삼아 웃음을 파는 글을 쓴 적이 없는지’ 돌아보며 가슴에 손을 얹곤 한다. 앞으로도 내내 조심하자고 다짐해 본다. 어쨌든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는 없었지만 여동생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나도 딱히 보고 싶었던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가 “야 이 계집애야, 여기는 내 집이니까 그냥 봐, 나 박서준 팬이야”라며 화면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이럴 경우에 영세 중립국인 아버지와 나는 강대국 편에 서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결국 추석 연휴의 엄마네 집 폐막작은 <청년경찰>로 결정되었다.

줄거리야 도처에 널려 있으니 여기서 읊조리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우연히 납치 현장을 목격한 경찰학교의 두 학생(강하늘, 박서준)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눈에 띈 대목만큼은 얘기해 보고 싶다. 실낱같은 단서를 추적한 끝에 납치된 이가 ‘귀청소방’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성임을 알고 손님으로 가장해 그곳에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영화 속 ‘귀청소방’은, 한때 일본에서 유행하던 이어테라피(귀를 통해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균형이 어긋난 몸을 조화롭게 맞추는 자연치유 요법) 전문 업체의 콘셉트를 적당히 분위기만 흉내 내어 ‘귀 청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사 성행위 업소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동생은 “남자들이 저런 데를 드나드는 게 문제라니까”라며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별생각 없이 “뭘 그렇게 색안경을 끼고 봐. 건전한 업체도 많아”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여동생이 내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 가봤어?” 대답을 안 해 주면 내년 추석 특집 영화가 방영될 때까지 물고 늘어질 분위기였다.

영화 <청년경찰> 보다
'귀청소방' 알게 돼

그곳이 정확히 ‘귀청소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비슷한 곳에 가본 적이 있다. 당시 우리 아버지는 일본 오사카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한국에서 근무하던 회사가 부도로 문을 닫은 이후에 마땅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길이라고 들었다. 미도파백화점 근처 재래시장에서 칼국수를 팔던 엄마는 분기에 한 번씩 밑반찬을 만들어 아버지한테 갔는데 중학교에 막 올라가던 해에 나도 딱 한 번 동행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살림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한 명이 겨우 발을 뻗으면 꽉 차는 단칸 셋방 아파트에 가스레인지도 없이 버너로 음식을 해 먹는 모습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기가 막힐 정도였다. 가족을 건사하는 부모의 심정을 조금쯤 느꼈다고 얘기하면 너무 건방진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 와본 ‘외국’이 궁금해졌다. 돌아가서 친구들한테 자랑할 만한 에피소드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여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아파트를 빠져나와 어슬렁어슬렁 근처를 돌아다녔다.

정처 없이 길거리를 걷다가 어떤 가게를 발견했다. 척 보기에도 일반적인 상품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아닌 듯했다. 왜 그렇게 느꼈느냐면, 대문에 ‘귀 이’(耳)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생이었지만 쉬운 한자라서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아는 글자여서 반갑기도 했다. 대문 양쪽의 등롱에도 마찬가지로 ‘耳’자가 쓰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반쯤 열린 문틈으로 왁자한 웃음이 세어 나왔다. 고개를 살짝 디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기자기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 안에서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장난을 치며 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한 마리가 나를 보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내가 손을 뻗자 ‘갸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귀를 내 손에 비비며 친근감을 표시해 주었다. 그곳은 흡사,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지루할 것 같지 않은 천국 같았다.

내가 고양이들과 한참 놀고 있는데 안채에서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가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알아듣지 못하자 내 손을 잡더니 어딘가로 데려갔다. 꼬불꼬불한 복도를 한참 지나는 동안 한 번씩 돌아보며 안심하라는 기색으로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가슴 설레던지. 이윽고 따라 들어간 방에는 중년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색이 바랜 기모노 차림이었다. 뭔가를 읽다가 우리가 들어가자 고개를 들었는데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몸이 수척하고 전체적으로는 병색이 완연한 인상이었다. 이목구비 가운데 귀만 눈에 띄게 컸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내 손을 잡고 데려온 소녀의 엄마가 아니었을까.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이내 여자애가 밖으로 나가고 나만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중년의 여성은 지그시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무척 따뜻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자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왼손으로 두 번 가볍게 때렸다.

이게 무슨 뜻이지?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우리 엄마가 내 귀를 후벼주기 전에 저렇게 무릎을 탁탁 쳤는데. 서, 설마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우라는 건가.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웃음이 배어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손목을 잡고 살짝 끌어당겼다. 한낮의 태양이 눈부시고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 부는 오후였다. 나는 어느새 귀이개를 손에 든 상대방의 무릎에 모로 누워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장지문 밖으로 아물아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귀 내벽에 귀이개가 쓱 떨어진 것 같은 감각이 있고 나자 멀리서 조용히 파도 소리가 들렸다. 귀이개는 단단하면서도 불가사의한 부드러움을 더해가 낭창낭창, 그 끝이 개미핥기의 혀가 되어 모든 것을 핥는 것처럼 귀 안을 침식해 갔다. 그것이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가 달팽이관을 간질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실제로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귀이개인지 귀이개가 나인지 모를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른 느낌이었다고 하면 짐작이 되실지.

일본에 일하러 간 아버지 덕에
우연히 알게 된 '귀 파주는 가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위가 어둑해진 듯했다. 그제야 부모님이 나를 찾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벌떡 일어나 장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밖으로 나온 줄 알았다. 한데 당연히 있어야 할 복도 대신 다른 방이 나타났다. 이상하다 여기며 그 방의 장지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또 방이 나왔다. 그다음 방도, 그다음 방도, 복도는 나오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자 이번에는 건너편 방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라고또, 소라고또”라고, 내 귀에는 그리 들렸다. 낮고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점차 위협적인 울림을 띠더니 조금씩 가까워졌다. 몹시 화가 난 듯 거친 숨소리도 섞여 있었다. 무릎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침내 ‘그것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을 때, 나는 앞에 보이는 문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고 달려서 똑같은 방을 몇 칸이나 지나자 숨이 턱에 찼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쓰러지겠구나 하던 찰나, 가까스로 다음 장지를 부서져라 발로 걷어찼는데 어느새 처음 맞닥뜨린, ‘耳’자가 적힌 대문 밖으로 뛰어나와 있었다. 태양은 여전히 쨍쨍했다. 나는 휘청거리며 아파트로 돌아왔다. 희한한 것은 아파트를 나선 시점으로부터 돌아오기까지 불과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내가 겪은 건 뭐였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귀를 맡기지 말라는 일종의 메타포 같은 것이었을까. 흐음.

가만있자. 지난 30년 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왜 갑자기 튀어나왔더라. 아 참, <청년경찰>에 나온 ‘귀청소방’을 보다가 여동생의 질문을 받는 중이었지. “오빠, 가봤어?”라는 여동생의 물음에 내가 멈칫거리자, 이번에는 난데없이 엄마가 “나는 가본 적은 없지만 가볼 뻔한 적은 있어”라는 말을 꺼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내가 오랫동안 중이염을 앓았잖니. 늘 귀가 가려워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러다가 ‘귀청소방’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길을 걸어가는데 전단지가 눈에 띄기에 집어 들어 보니 ‘코스프레식 귀청소방’이라고 쓰여 있더란다. ‘코스프레식’이라는 게 뭔지는 몰랐지만 ‘귀 청소’라는 말이 반가워서,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매번 병원을 가도 차도가 없을 때 민간용법을 찾는 심리 같은 거. “획기적으로 귀를 청소해 주면 중이염도 낫지 않을까 싶어서”라고 한다. “그래서?” “전단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 남자가 받더라고. 내가 귀를 청소해 주는 데냐고 물었는데 이 남자가 당황하는 거야.” 남자 쪽에서 무슨 일로 전화를 걸었느냐고 되물은 모양이다. 무슨 일로 걸긴 무슨 일로 걸어, 귀 청소 한번 해보려고 걸었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혹시 일자리를 구하시려는 거냐고 조심스럽게 묻더란다. 응? 귀 파러 간다니까 뚱딴지처럼 웬 일자리? 그제야 엄마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거기 귀 후벼주는 데 아니냐고 물었다. 이때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돌아온 남자의 대답이 기가 막힌다. “사모님, 주위에 자~알 알아보시고 생각 있으시면 다시 전화 주세요.”

'귀 파기' 소재 만화 다시 펼쳐
재밌는 에피소드에 웃음 절로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데 ‘귀 파기’를 소재로 그린 만화가 있다. <심야식당>으로 유명한 야베 야로의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 데뷔작이다, 나이 마흔에 그린. 덕분에 19년간 근무했던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가 잡지에 실렸을 때 업계에서는 ‘이런 소재로 만화를 그리다니 상당히 허무맹랑한 놈이군’이라는 식으로 평가한 모양이다. 독자들의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야베 작가는 열심히 연재를 이어갔다. 본인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야베 야로 작가의 만화가 잡지에 실리고 나서 이듬해에 실제로 ‘귀 파주는 가게’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면서 점포를 늘려가더니 매스컴에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돈을 내고 귀를 맡기다니,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형제자매님들은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를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이 만화를 읽고 나면 틀림없이 가보고 싶어질 테니까. 물론 제대로 된 업소에 말이다. 이렇게 쓰고 있노라니 귀가 또 근질근질해지는 기분이 든다. 언젠가 일본에서 사 온 귀이개가 어디 있을 텐데. 아참, ‘소라고또’(そらごと)는 ‘헛소리,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글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일러스트 이민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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