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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19 09:33 수정 : 2018.04.19 09:39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이렇다 할 약속이 없으면 점심때는 도서관 구내식당에 간다. 매일 반찬이 바뀌는 백반이 나오기 때문이다. 값도 싸다. ‘밥+국+네가지 찬’이 4000원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점은 혼자서 책을 읽으며 밥을 먹는 사람이 여러명 있다는 거다. 그 속에 섞여서 나도 책을 한권 펼쳐놓고 느긋하게 식사를 한다. 읽어야 할 책은 매주 정해져 있는데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생각해낸 방편이다. 일반 식당에서는 아무래도 어렵다. 주인 눈치가 보이니까. 주변 손님들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고.

하루는 낮 12시 정각에 맞춰 도서관에 갔는데 구내식당 앞에 많은 인파가 줄을 선 모습이 보였다. 초등학교에서 단체 견학을 온 모양이다. 재잘재잘, 조잘조잘. 귀엽고 시끄럽다. 성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면 나도 기다렸을 텐데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구내식당은 자율배식제로 운영하니까 각자 알아서 자신이 먹을 만큼의 밥과 반찬을 퍼 담아야 한다. 한데 내 앞으로 줄을 선 이들이 전부 초등학생이다 보니 한명의 학생이 밥과 반찬을 담는 시간이 오리무중이어서 대열이 줄어들질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 나왔다.

그럼 오늘은 어디서 먹나. 배에서 소주잔에 맹물 따르는 소리가 나고 다리까지 후들거려 멀리 갈 수도 없었다. 나는 도서관 근처에서 가장 손님이 적을 것 같은 식당에 들어갔다. 자주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가볼 생각을 하지 않던 덮밥집이었다. 예상대로 조용해서 마음에 들었다. 손님은 딱 한 팀 보였다. 책을 보면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는 가쓰돈(돈가스덮밥)을 주문했다. 아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엄청나게 맛있질 않은가. 가격도 저렴하다. 이후로 나는 자주 덮밥집을 찾았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날 나는 새삼스레 ‘계기’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만약 초등학생들이 도서관으로 단체 견학을 오지 않았다면 내가 덮밥집에 갈 일은 없었으리라.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없었을 것 같다. 대형쇼핑몰의 푸드 코트 외에는 성격상 혼자서 식당에 가질 못하니까. 때문에 이렇게 맛있는 가쓰돈을 만들어 내는 조용한 식당의 존재를 죽을 때까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구내식당 앞에 늘어선 줄이 정체되었을 때 속으로나마 초등학생들에게 몹쓸 말을 뱉은 걸 사과하고 싶다.

덮밥집의 이름은 ‘다루마야’였다. 열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이 네개 있는 작은 가게다. 밖에서 볼 때와 달리 내부는 깔끔한 인상이었다. 구석에는 꽤 많은 양의 일본 서적이 예쁜 그릇 위에 오밀조밀 전시되어 있었다. 메뉴판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귀여운 필체로 벽에만 붙여 놓았다. 주인장의 나이는 삼십대 후반 정도일까. 갸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썼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매력 있는 얼굴이다. 주방장은 따로 두지 않고 요리와 서빙을 직접 했다. 이 여성이 일본인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할 무렵, 나는 점심이 아니라 저녁을 먹으러 다루마야에 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게는 한산했다. 내가 들어갔을 때 주인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다. 무심코 쳐다보니 제목이 <섬에 있는 서점>이었다. 어, 지금 내 가방에도 저 책이 있는데. 반가워서 아는 척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괜히 수작을 거는 듯 보일까 싶어서다. 나는 자리에 앉아 가쓰돈을 주문했다. 그런데 주인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손님. 오늘은 가쓰돈 재료가 다 떨어져서요.”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걸 먹으라고 권할 법도 한데 아무 말이 없었다. “규돈(쇠고기덮밥)은 되나요?” “네.” “그럼 그걸로. 맥주도 한병 주시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섬에 있는 서점>을 꺼내 읽었다. 이 소설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남동쪽에 있는 작은 섬의 유일한 서점을 무대로 삼고 있다. 서점 이름은 아일랜드. 직원 없이 주인이 혼자 운영하는데, 좋아하는 책만 팔고 싫어하는 책은 비치해 놓지도 않는다. 문제는 그의 취향이 남다르다는 거다. 우선 삽화가 실린 책을 싫어한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의 소설도 싫어한다. 칙릿(Chick Lit. 젊은 현대 여성을 겨냥한 영미권 장르소설)도 싫어한다. 탐정소설이나 판타지 같은 장르 잡탕 소설도 싫어한다. 400쪽이 넘거나 150쪽이 안 되는 책도 싫어한다. 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도 싫어한다. 연예인 사진집, 운동선수의 회고록, 반짝 아이템은 구역질을 낼 정도로 싫어한다. 그렇다면 뭘 파느냐. 순문학만 판다. 이런 괴팍한 주인이 운영하는 서점에 나이틀리 출판사의 영업사원이 찾아오는데 두 사람이 툭탁거리며 싸우다가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찰나,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주인이 쟁반에 담아 온 요리와 맥주를 내려놓다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책의 제목이 <섬에 있는 서점>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멈칫, 했다. 혹시 뭔가 물어봐주려나. 입을 달싹거리기에 내심 기대했지만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카운터로 돌아간 주인은 책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읽기 시작했다. 나도 책을 읽으며 천천히 규돈을 먹었다. 가게 안은 조용했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외에는 양쪽에서 번갈아가며 책장 넘기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이윽고 서점 주인과 영업사원 사이에 알콩달콩한 연애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아일랜드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출판사’라는 영예가 나이틀리에게 돌아갈 즈음에는 규돈이 담겼던 그릇을 싹싹 비울 수 있었다. 정말이지 ‘올 유 니드 이즈 러브’(All You Need Is Love) 같은 전개 아닌가. 나는 남은 맥주를 기분 좋게 마시고 계산을 한 뒤에 밖으로 나왔다.

덮밥집 주인을 다시 만난 건 그 주 일요일이었다. 나는 절판된 책을 구해 볼 일이 있어서 도서관에 갔다. 우선 빌릴 책은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였다. 서너시간 앉아서 읽다 보니 헤밍웨이가 자신의 소설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피츠제럴드를 대놓고 욕하는 장면을 인용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궁금해져서 <파리는 날마다 축제>도 빌리기로 했다. 폐장 시간을 10분쯤 남기고 나는 사서에게 두권의 책을 내밀었다. 그런데 어라, 지갑에 들어 있는 줄 알았던 회원카드가 보이질 않는 거다. 당황한 내가 가방 안을 뒤적뒤적 더듬거리는데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제가 빌려드릴게요” 하며 자신의 회원카드를 쑥 내밀었다. 덮밥집 주인이었다. 도서관이 문을 닫기 전에 대출하려고 줄을 서 있었던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같은 인사가 한차례 오간 뒤에 우리는 각자 빌린 책을 들고 나란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밤바람이 시원했다. 슬슬 걸어가는 동안 나는 이 정도쯤은 실례가 아니겠지 싶은 걸 몇가지 물어봤다. 그러고는 그녀의 이름이 유코라는 걸 알게 되었다. 유코는 누가 들어도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어학을 공부하는 데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출판사에서 일했어요”라고 말했을 때는 다소 놀랐다. 나도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알려주자 조금 전에 내가 지었던 것과 비슷한 표정이 유코의 얼굴에 떠올랐다. 결국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가 되어 우리는 종종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유코는 졸업하자마자 일본 굴지의 출판사에 입사하여 15년 가까이 외국 소설의 기획을 담당했다. 적성에 잘 맞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쓴 소설을 ‘발굴’하고 번역해서 소개하는 일을 하는 데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유코가 관심이 있는 것은 대중문학이 아니라 순문학 쪽이어서 일본 내에서의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베스트셀러는커녕 겨우 제작비를 회수하는 정도였다. 유코의 기획에 대한 출판사 내부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그로 인해 회사와 갈등이 생기고 말았다.

퇴사를 결심한 계기는 ‘도쿄 국제 도서전’이었다. 1994년에 시작된 도쿄 도서전은 저작권 교류의 장으로서 출판사와 중개업자들에게 의미가 큰 행사였지만 2016년에는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참여하여 즐길 수 있는 콘셉트로 방향을 선회한다. 출판업 전체의 판매 감소에 따른 고민의 결과였다. 애초 평일에 열렸지만 독자들이 방문하기 쉽도록 주말이 포함된 일정으로 변경하고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엔터테인먼트적인 이벤트를 대거 기획했다. ‘전례가 없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언론의 평가를 받았을 정도다. 하지만 결과는 대참패. 참여한 출판사들의 매출이 저조했다는 의미의 참패였다. 급기야 대형 출판사들이 도서전 불참을 선언하면서 이듬해에는 열리지 않았다. 2018년에도 마찬가지 이유로 개최가 어렵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도서전이라는 행사가 갖는 의미를 오로지 판매와 실적으로만 평가하는 건 곤란하지 않나요.”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서도 책을 판다고 얘기해오지 않았던가. 늘 독자를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무슨 독자를 위하는 건가. 거짓말이지, 안타까운 거짓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하다. 표정도 온화하다. 하지만 실망했다는 마음이 전해졌다. 팔릴 만한 책을 만들어라, 안 팔릴 것 같은 책은 포기하라는 회사의 논리에 질리고 말았다. “책을 만드는 일이 시시해져버렸어요”라고 한다. 유코는 미련 없이 출판사를 그만뒀다. 전혀 다른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요리를 공부했다. 다행히 그녀는 뭔가를 배우는 데 소질이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먹고 싶은 걸 손님에게도 제공하며 독자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어디나 똑같은 것 같아요. 독자들이 읽지 않는 것만 탓할 뿐이죠. 하다 하다 할 게 없어야 책도 읽는 법인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든 해볼 생각은 않고. 출판을 천직이라 여긴 저도 질렸는데 독자들은 오죽하겠어요. 질리는 데는 이유가 없죠. 당신도 편집자니까 알겠지만. 한국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작년부터 도서전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어떻게 하면 독자들과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을까’라거나 ‘이런 걸 하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에 공을 들였다고 할지. 저한테도 책을 몇권이나 팔았는지, 돈은 얼마나 벌었는지 물어보는 대신 어떤 아이디어는 참 좋던데 독자들 반응은 어땠는지 물어보는 출판사 분들이 많아서 기쁘던데요.”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방긋 웃었다. ‘2018 서울국제도서전’은 6월20일부터 24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다. “올해는 당신도 놀러 오세요. 틀림없이 어떤 계기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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