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3.21 20:20 수정 : 2018.03.21 20:26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패키지여행이란 무엇인가. 혹시나 싶어서 찾아보았다. 사전에는 이렇게 등재돼 있다. “여행업자가 주관하여 행하는 단체 여행. 미리 정하여진 관광 여정에 따라 각종 교통편과 숙박 시설, 기타 편의 시설 이용과 그 비용 따위를 일괄하여 여행사에서 관장한다. ‘한 묶음 여행’으로 순화.” 그러고 보니 내 생애 최초의 패키지여행은 고등학생일 무렵에 다녀왔구나. 경주 불국사로. 친구들과 함께한 수학여행은 즐거웠지만 식사와 잠자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관광도 처삼촌 벌초하듯 했고. 부모님이 대신 내준 경비가 온전히 학생들을 위해 쓰였을까. 어쩐지 아니었을 것만 같다. 아마 이때부터였으리라. ‘패키지여행=싼 게 비지떡’이라는 편견이 생긴 건.

그 뒤로 여러 나라를 놀러 다니면서도 패키지여행 상품을 이용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보고 싶은 장소에 가기 위해 직접 코스를 짜지 않는 여행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재미도 없을 테고. 그런 생각에 균열이 생긴 건 이달 초에 일본을 다녀오고 나서다. 설 연휴를 며칠 앞두고 무척 추웠던 어느 날, 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책상에 앉아 멍하니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디 온천에라도 가서 머리까지 푹 담그고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문득 “일본 온천 여행, 499,000원부터”라고 적힌 페이스북 광고가 눈에 띄었다. 평일에 출발하면 더 싸고 주말을 끼면 비용이 올라가지만 2박3일 내내 온천마을의 고급 료칸에서 가이세키 요리를 먹으며 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수학여행은 부실한 패키지여행
지금도 생각나는 그때 나쁜 기억

어라, 정말 이 가격에 그게 가능해? 예전에도 비슷한 광고를 종종 마주했지만 무시했다. 수학여행 때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낯선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딱히 내키진 않았다. 분명 프라이버시 따위는 무시되겠지. 한편으로 궁금증도 생겼다. 과연 얼마나 엉망진창일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는 독자들과 함께하는 유럽 책방 투어를 기획 중인데 뭔가 배우든 반면교사로 삼든 시중에 횡행하는 패키지여행을 한 번쯤 따라가 봐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해서 10분 동안 고민한 끝에 신청했다.

공항에 모인 인원은 22명이었다. 팀으로 분류하자면 연인과 부부가 많았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온 자매님이 한 팀, 여고 동창 모임인 듯한 자매님들이 한 팀, 부부 동반으로 온 어르신들이 한 팀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은 에어서울, 도착지는 우베(일본 야마구치현)였다. 기류가 불안정해서 비행하는 내내 멀미로 고생했지만 우베의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슬렁슬렁 돌아다니기에 딱 좋았다. 세 시간 전까지 한국에서는 파카를 입고 다녔는데. 전용차량은 45인승이어서 옆 좌석이 아니라 앞뒤 좌석으로 각각 앉아서 가는 팀이 여럿 눈에 띄었다. 연인은 붙어 앉고 부부는 따로따로 앉는다고 여기면 대충 맞을 듯했다. 굳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구성애씨를 닮은 가이드는 자신을 “저기요”가 아니라 “나 피디”로 불러달라고 했다. 내가 구성애씨를 떠올린 건 가이드의 입담이 굉장해서다. 하여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우리가 방문할 곳의 특징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정치와 경제, 교육 현실과 최근에 벌어진 뉴스까지 팩트와 논평을 적절히 섞어서 유머러스한 어조로 명쾌하게 설명했다.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 게 시시해질 정도였다. 일본 가이드로만 15년 가까이 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팔짱을 끼고 시큰둥해하던 일행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 피디의 입담에 빠져드는 게 느껴졌다.

“이제 잠시 후면 여러분이 묵을 료칸에 도착할 텐데요. 우레시노(사가현)는 일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뛰어난 수질을 자랑하는 미용 온천으로 유명해요. 미용뿐 아니라 신경통, 빈혈, 호흡기 질환 등의 치료에도 효과를 볼 수 있어서 요즘에는 벳푸나 유후인보다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고요. 다른 온천은 그냥 지나치지만 우레시노에서는 저도 손님들 안내할 때마다 꼭 온천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피부가 좋은가 봐요, 호호. 하지만 좋다고 무작정 탕에만 계시면 곤란합니다. 저녁 먹고 산책 좀 하시다가 밤에 한 시간, 그리고 아침에 식사하시기 전에 삼십 분 정도 하는 게 딱 좋아요.”

비수기여서 관광객이 많진 않았다. 차에서 내리니 온천마을답게 유황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살랑, 불었다. 이곳의 명물 ‘우레시노 온천수 두부’를 곁들인 가이세키 요리를 먹고 쉬다가 온천에 몸을 담근 시간은 밤 9시였다. 커다란 탕 안에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월요일이었으니까. 평일 저녁 9시에 온천을 하러 오는 현지인은 없는 모양이다. 뿌연 물속에 들어가자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가 매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온기가 몸을 흐늘흐늘하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렇지, 내가 이러려고 온천에 온 거지. 하마터면 사자후를 토할 뻔했다. 20분쯤 몸을 덥히고 밖으로 이어진 노천탕으로 나갔다. 대욕장에 비해 훨씬 넓고 특이한 구조라서 탐구욕이 절로 솟았다.

노천탕은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일본식 정원이 아담하게 펼쳐진 가운데, 바깥쪽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사이로 커다란 탕이 하나 있고 안쪽에는 마치 ‘선녀와 나무꾼’에나 등장할 법한 작은 탕이 하나 있었다. 적당히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눈앞을 가려서 누가 있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작은 탕이 특별한 곳임을 안 것은 잠시 뒤의 일이다. 10분가량 지났을까. 청년 한 명이 하얀 수건으로 중요 부위를 가린 채 작은 탕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벽 중앙을 더듬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벽이 아니라 벽처럼 보이는 문이었다. 청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무슨 말인가 중얼거렸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이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웬 여자? 누구와 이야기하는 거지? 그걸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궁금증은 청년이 탕을 나가고 나서야 풀렸다.

40만원대 일본 패키지여행 광고 발견
설 연휴에 호기심 일어나 신청

작은 탕 저쪽 편은 여탕이었다. 커다란 담벼락으로 나뉘어 있지만 벽 한가운데 비밀스러운 출입문이 있었던 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안에 한 사람이 서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나타났다. 맞은편도 같은 구조다. 여탕에서도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다. 즉, 이곳은 연인이나 가족이 벌거벗은 채로 해후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인 셈이다. 광장이라기엔 턱없이 작긴 한데 안으로 들어서면 양쪽의 문을 잠글 수 있기 때문에 방해받을 일은 전혀 없다.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오호, 기이하도다.

하지만 정작 기이한 일이 벌어진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탕에 들어갔다. 남탕과 여탕이 바뀌어 있었다. 이건 예전에도 몇 번인가 경험했다. 양기와 음기의 조화를 위해서, 노천탕의 경우 바깥 풍경이 다르니까 남탕과 여탕을 바꾸어 골고루 감상하라는 취지라는데, 맞는 설명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대욕탕을 지나 곧장 만남의 광장으로 향했다. (어제의) 여탕 쪽 구조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온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 남자는 스마트폰으로 구석구석을 촬영 중이었다. 셀프 동영상을 찍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데도 다 알아듣겠더라. 한국말이었거든. 반가운 한편으로 이거 불법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멈칫 놀라더니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40대 중반이려나. 남자는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스미마셍”(미안해요)이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해주었다. “아뇨, 저도 한국 사람이에요.” “아!” 그는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수건으로 감싸고 탕에 몸을 담갔다. 나도 가만히 물속에 자리를 잡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먼저 입을 연 건 남자였다. “아까 제가 촬영하는 거 보셨지요?” 나는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그러니까, 실은 사연이 있어서.” 사연이라. 그 와중에도 재미있는 사연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우레시노는 남자가 아내와 함께 결혼 전에 왔던 여행지다. 두 사람은 이곳 온천호텔 가스이엔에 묵었다. 노천탕에서 만남의 광장을 발견한 건 아내였다. 두 사람은 사흘간 묵으면서 아침저녁으로 만남의 광장에서 사랑을 나눴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 기억은 특별하게 남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내는 지금 루게릭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뇌 신경의 지시가 전해지지 않아서 근육을 움직이지 못한다. 앞으로 온몸의 근육, 심지어 혀와 목 근육까지 서서히 쇠약해지다가 결국은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치료법은 없다고 한다.

여탕·남탕 오가며 사진 찍는 남자 만남
사연 들어보니, 심금 울리는 사랑

하지만 루게릭병 환자 중에는 인공호흡기를 장착하고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스티븐 호킹 같은 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날이 절망 속으로 빠져가는 아내의 마음을 어떻게든 격려하고 설득하기 위해 남자는 틈나는 대로 아내와 다녔던 여행지를 찾아가서 그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는 중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가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삶의 희망을 되찾을 수 있도록. 다시 건강해져서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나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말문이 턱 막혔다. 아침 햇살 탓이었을까. 남자의 눈가가 반짝, 하고 빛난 듯했다.

이 이야기의 끝은 하라다 마하 작가의 소설 <여행을 대신해 드립니다>에서 확인하시면 좋을 듯하다. <낙원의 캔버스>를 읽었다면 동의해주시겠지만 이 작가에게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재주가 있다. 끝으로 하나만 더. 이번에 다녀온 패키지여행은 (1)가이드의 수준 (2)각 팀끼리 따로 자리를 마련해준 모든 일정의 식사 (3)이틀간의 잠자리 (4)서로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질문을 일절 하지 않는 멤버들의 에티켓까지 몽땅 다 마음에 들었다. 아아, 그리하여 나는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패키지여행 관련 사이트에 드나들며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는 중이다. 바야흐로 여행하기 좋은 계절 아닌가.

글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일러스트 김효찬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