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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21 20:13 수정 : 2018.02.21 22:39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내가 지하철 7호선 중화역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의 일이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말이 반지하지 빛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집채만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커다란 바퀴벌레도 심심찮게 눈에 띄곤 했다. 바퀴벌레가 날아다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무렵에 알았다. 세탁기가 없어서 빨래는 대충 손으로 하거나 한 달에 한 번씩 근처에 사는 선배네 신세를 졌다. 대신 세제는 내가 사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중화역이었냐면 북스피어 출판사 사무실이 7호선 학동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스피어가 세 들어 살던 잡지사를 따라 강남으로 이사 간 건데 사무실을 옮기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취방을 구하는 거였다. 7호선으로 한 번에 이동할 수 있고 월세가 싼 동네를 찾다 보니 흘러 흘러 중화역에 이르게 되었다. 중화역에서 학동역까지는 지하철로 30분쯤 걸린다. 오며 가며 무가지도 읽고 신문도 읽고 책도 읽었다. 누군가가 선반에 놓고 내린 스포츠신문을 발견하면 수지맞은 기분이 들던 때였다.

한 아가씨 다가와
"이번에 내리냐?” 물어 “예”라고 답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학동역에서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어떤 아가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저기요” 하고 입을 떼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내리세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제대로 들었는데 이해를 못 한 거겠지. 내가 “네?” 하고,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되묻자 상대는 아까보다 입을 좀 더 내 귀에 바짝 대고 다시 물었다. “이번 역에서 내리시는 거 맞죠?”라고. 세상에. 이 무슨 아닌 밤중에 커피음료 시에프(CF)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그제야 나는 “아, 네” 하고 대답했다. 딱 부러지는 “아, 네”가 아니라 허둥지둥 백숙을 먹다가 목에 닭 뼈가 걸린 듯한 뉘앙스의 “아, 네”였다.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쯧쯧, 당황하고 말았다.

“저, 이번에 내려요”라며 전지현씨가 수줍게 웃던 아련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호, 혹시 이 사람이 지금 나를 유혹하려는 건가.’ 그제야 비로소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랑 세 살 차이 나는 사촌 누나 또래쯤 됐겠다.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상대는 아군에게 암구호를 전파하는 병사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번에 내리시면요, 저기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분을 따라가 봐 주시면 안 될까요.” 자매님의 시선이 향한 곳엔 검은색 치마 정장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탔으니 아마도 출근하는 중이었으리라. 이상했던 건 남자 한 명이 뒤에 찰싹 붙다시피 서 있었다는 거다. 그게 왜 이상했냐면 두 사람이 전혀 동행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쯤 됐을까. 밤색 잠바에 검은색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고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았다.

자매님이 들려준 사연은 대충 이랬다. 자신이 보기에 정장 여자와 잠바 남자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잠바 남자가 정장 여자 뒤에 어색할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다고 한다. 출근길이어서 객차가 꽉 찼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했는데 정장 여자가 한 걸음 옆으로 옮기면 잠바 남자도 슬금슬금 뒤에 붙어 서고 정장 여자가 또 한 걸음 자리를 옮기면 잠바 남자도 다시 그 뒤에 붙어 서더란다. 이상하다, 확실히 이상하다고 자매님은 생각했다. 이것은 추행이 아닌가. 잠바 남자가 정장 여자를 추행하고 있다고 자매님은 확신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긴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자기라도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으리라. 얼마간 무섭기도 했을 테지. 정장 여자가 문 앞으로 다가가 내릴 채비를 했을 때는 조금쯤 안도했을까. 그런데 남자가 거기까지 따라가자 기함하고 말았다.

자매님은 재빨리 고민했다. ‘저 둘을 따라 내릴까. 내가 내릴 역도 아닌데. 신고하면 순찰대가 오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일단은 이번 역에서 내리는 남자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을 수 있겠다.’ 그때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선 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혹시 잠바 남자에게 들릴까 싶어 자매님은 최대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워낙 빠르고 작은 목소리여서 자초지종을 전부 알아들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금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매님도 정장 여자만큼이나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에게 이 정도로 감정이입해 있다니. 이것이, 내가 첫번째로 감탄했던 대목이다. 나도 자매님과 같은 칸에 타고 있었지만 전혀 몰랐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구나.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작게 끄덕여 보였다. 불의를 보면 시종일관 끝까지 참았던 내 성정으로 미루어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만큼 자매님의 눈빛이 절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는 잠바 남자의 체구가 왜소하고 그다지 운동을 열심히 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저 정도라면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투지가 용솟음치려는 찰나, 자매님이 주의를 주었다. “근데 조심하세요, 저 남자, 손에 라이터를 들고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주먹을 쥐고 있는 잠바 남자의 손에 편의점에서 400원만 주면 살 수 있는 라이터의 윗부분이 보였다. 젠장. 거기서부터는 나도 슬슬 겁이 났다. 화도 났지만 동시에 겁도 났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칼이나 가위도 아닌데 뭘 어쨌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라이터가 화염방사기처럼 보였다. 대구 중앙로역에서 일어나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낸 지하철 방화사건이 떠올랐다.

성추행 직전 여성 도와 달라 요청
따라 내려 추행범 팔 잡아 도움

나는, 나를 도와줄 남자가 있는지 객차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객차에 있는 여자들 대부분이 정장 여자와 잠바 남자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신문을 읽거나 멍하니 허공을 보거나 졸고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상황을 간파한 남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은 달랐다.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 눈빛도 주고받지 않았을까. 이것이 내가 감탄한 두번째 대목이다. 이내 문이 열렸다. 정장 여자가 후다닥 뛰어내렸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갔다. 그 틈을 헤집고 잠바 남자도 기민하게 정장 여자를 쫓는 모습이 보였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도 따라 내렸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다짜고짜 잠바 남자를 돌려세웠다. 남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이거”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나는 약간 사이를 두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도나 기에 관심 있으세요?”

“뭐요?”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라이터를 쥐고 있는 손을 쓰지 못하도록 팔을 힘주어 붙들며 나는 말했다. “인상이 참 좋으신데.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하시지요.” 내가 그를 붙잡고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정장 여자는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정신없이 개찰구를 통과해서 역을 나가자마자 택시 같은 걸 잡아탔을 거라고 짐작한다.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라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던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더니 두리번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역 밖에서도 정장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잠바 남자가 따라오나 싶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회사로 향했다.

이것은 내가 9년 전에 겪은 일로 북스피어 홈페이지에 적어두었는데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 귓속말을 전하던 자매님의 불안한 음성과 평화로운 줄 알았던 객차 안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바뀌던 찰나와 느긋하게 신문을 읽던 남자들과 걱정스럽게 한 곳을 응시하던 여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나는 최근에야 비로소 왜 남자들과 여자들의 태도가 확연히 달랐는지 깨달았다. 어느 한쪽에게는 그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여자친구의 차를 탈 일이 있었다. 그녀가 운전석에 앉아서 제일 처음 한 행동은 안전벨트를 매는 것도, 시동을 거는 것도, 백미러를 조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동차의 문을 잠그는 일이었다. 차 문은 일정 속도 이상이 되면 승차한 이들이 튕겨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동으로 잠기지 않나? 이상해서 물었더니 갑작스러운 외부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익힌 습관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홀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내가 타려 하자 몸을 돌려 계단으로 뛰어가던 여자아이와 배달음식을 시킬 때마다 자기 집을 놔두고 굳이 아파트 현관까지 내려와서 받아들고 가던 위층 여자와 회식이 있는 날은 절대로 치마를 입지 않던 여자 동료와 밤늦은 시각에 집 앞에서 하차하면 자기가 어디 사는지 노출될까 봐 택시가 떠나는 걸 확인한 뒤에 집에 들어간다던 여자 후배와 매번 가까운 지하주차장을 놔두고 멀리 있는 지상주차장을 이용하던 출판사 여사장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성들의 공포 이해하게 된 계기
남성들에게 <걷기의 인문학> 추천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실비아 플래스의 일기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내 끔찍한 비극이다. 길에서 일하는 사람들, 선원들과 병사들, 술집 단골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은데,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은데, 경청하고 싶은데, 기록하고 싶은데, 다 망했다. 내가 어린 여자라서. 수컷으로부터 습격당하거나 구타당할 가능성이 있는 암컷이라서.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남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데, 그렇게 궁금해하면 유혹한다고 오해받는다. 모든 사람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천에서 자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서부로 여행을 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밤에 마음껏 걸어 다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자각한 솔닛이 들은 충고는 “밤에 밖에 나가지 마라, 혼자 다니지 마라, 에스코트해줄 남자를 구해라” 같은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타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아이였고 툭하면 배달음식을 집으로 시켜 먹던 남자 자취생이었고 회식을 좋아하던 남자 직장인이었고 택시에서 곧잘 잠들던 남자 후배였고 가까운 지하주차장이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던 출판사 남사장님인 내가 ESC 지면에서 맡은 임무는 소설을 소개하는 거지만 오늘은 <걷기의 인문학>을 추천해본다.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단지 분야가 인문학이었을 뿐이라는 정도로 변명해 둘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건 지하철에서 불법 촬영, 성추행, 자위행위 등을 목격했을 때의 신고 요령이다. 112에 신고하되 굳이 통화가 아니라 문자로도 즉각적 출동이 가능하며 “7호선 강남구청역에서 학동역 방향으로 가는 열차에 밤색 잠바에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50대 남성 성추행범이 있다”는 식의 구체적인 묘사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일러스트 이민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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