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민혜.
|
풀려난 후 홀로 호텔에 남아 유럽 서점 유랑단 모집한 나
틈만 나면 유럽 여행 커뮤니티 뒤져 커뮤니티에서 SOS 친 이 봐
도움 주러 찾아갔는데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2017년 11월3일 자정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맨 처음 도착한 도시는 암스테르담이었다. 그다음은 인터라켄, 세번째가 여기 베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답게 베른은 (오가는 자동차의 행렬에 괄호를 쳐두면) 곳곳이 세트장 같았다. 오래된 돌담길과 고풍스러운 다리와 낡은 지붕에서는 도서관의 서가 깊숙한 곳에 꽂혀 있는 고서에서 풍길 법한 냄새가 났다. 거리는 갖가지 색을 빨아들인 나무들이 완연한 가을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시가지에 위치한 몇 군데 서점을 둘러보고 여행 세번째 날의 일정을 마쳤다. 그날 밤. 나는 하루의 여정을 정리하고 이후의 일정을 체크하느라 늦게까지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다음날은 마이어셰에 갈 예정이었다. 이곳은 5층짜리 건물 전체를 통째로 사용하는 규모의 서점이니까 아울러 인근의 독립서점도 함께 둘러보면 좋을 듯했다. 혹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유럽 여행 커뮤니티’에 접속해보았다. 하지만 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마주한 건 긴급하게 도움을 청하는 어느 자매님의 게시판 글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스위스 베른에 여행 왔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ㅠ. 언니가 사라졌어요. 도와주세요!!” 글이 올라온 시각은 밤 11시였다. 굳이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내가 이 사이트에서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알레그로 베른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기다렸다는 듯 답장이 도착했다.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으신가요?” 미심쩍은 바가 없진 않았지만 어차피 내 스마트폰은 유럽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유심카드로 갈아끼웠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여기고 번호를 보내주었다. 이내 전화가 걸려왔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편의상 자매님의 이름은 미경이라 부르겠다. 미경씨가 출국한 건 사흘 전이다. 친하게 지내던 사촌 언니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어쩌면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웃으며 스위스로 온 것이다. 이틀은 인터라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다음날 열차를 타고 베른으로 왔다. 숙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민박집 주인은 예약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근사한 식당을 추천해주고 현지인이 아니면 알기 힘든 관광 정보도 챙겨주었다. 연락은 카톡으로 왔다. 주인의 세심한 배려에 미경씨는 고마움을 느꼈다 한다. 하지만 베른의 민박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은 복층 구조였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정감 있게 느껴졌는데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다소 퇴락했다고 할까, 음침한 구석이 있어 실망했다. 숙박료가 싼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크기는 제법 컸다. 네 팀 정도는 묵을 수 있을 듯했다. 현관의 비번을 미리 받아놓아서 들어가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자신들 외에 다른 투숙객이 있으리라 여겼는데 안은 조용했다. 비수기라서 그런가. 외출했는지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미경씨와 언니는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한 뒤에 침대에 누웠다. 새벽부터 서둘러 움직인 탓에 금방 잠이 쏟아졌다. 미경씨가 눈을 뜬 건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계를 보니 겨우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차 때문에 깬 적이 없었는데,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보다 하고 혼자 픽 웃었다. 그런데 다시 잠을 청하려 몸을 돌렸을 때,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줄 알았던 사촌 언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장실에 갔나. 눈을 감았지만 5분이 지나도 돌아올 기미가 없자 신경이 쓰였다. 겁이 많은 언니가 혼자 산책을 나갔을 리도 없고. 찾아봐야겠다 싶어 주섬주섬 옷을 입으려는데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두 명인 듯했다. 중국어로 다투고 있었다. 간간이 벽을 치는 소리도 났다. 독일어나 불어였다면 달랐을까. 저들이 중국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장기 밀매’, ‘인신매매’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티브이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비슷한 내용을 봤던 것 같기도 하다. 왜 하필 중국인을 그런 식으로 묘사했느냐는 여론이 있었지만 입소문을 타고 흥행하는 바람에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은 유야무야 묻혔더랬다. 그사이에 다툼은 더욱 격렬해졌다. 가구가 부서지고 병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사촌 언니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떻게 하지. 경찰에 알려야 하나. 신고는 몇 번에 하더라. 전화를 해서 뭐라고 말하나. 언니가 없어졌다고.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이런 게 사유가 될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침착하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전화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당연히 사촌 언니가 보냈으리라 여겼다. 아니었다. 민박집 사장이었다. 집 근처 술집에 있는데 한잔하러 나오라고 적혀 있었다. 황당했다. 지금 시간이 몇신데. 미경씨는 “옆방에 투숙한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으니 얼른 민박집으로 와보시라”고 답신했다. “괜찮아, 걔들 장기 투숙자들인데 맨날 그러고 싸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보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자버리기는 아깝지 않으냐는 둥, 너를 위해 비싼 술과 맛있는 안주를 시켜놨다는 둥, 오지 않으면 술을 가지고 갈 테니 자지 말고 기다리라는 둥,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댔다. 이거, 미친놈 아닌가. 당장 짐을 싸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사촌 언니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없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럽 여행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스위스 베른에 여행 왔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ㅠ. 언니가 사라졌어요. 도와주세요!!” 여기까지가 전화로 전해 들은 내용이었다. 나는 호텔 밖으로 나가서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전달받은 주소대로라면 그리 멀지 않았다. 가는 동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한국에서 자매님 둘이 여행을 왔고, 한밤중에 언니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옆방에서 외국인들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민박집을 운영하는 한국인 남자 주인이 한국인 여자 투숙객을 희롱하고 있다. 옆방에서 싸운다는 중국인들은 한국인 주인과 한패일까. 그들이 미경씨의 사촌 언니에게 나쁜 짓을 했다면. 나라도 경찰에 연락해서 함께 가야 하나. 내가 혼자 가봐야 어이없이 제압당하기 십상인데. 택시로 10분쯤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근처 같은데 어느 집인지 모르겠어요. 잠깐 나와주실 수 있나요?”, “나갈 수가 없어요. 여기 주인이 현관을 막고 있어요. 저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 들어와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오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한참을 뛰어다닌 끝에 가까스로 주소지를 찾을 수 있었다. 대문 옆에 달린 벨을 눌렀다. 찌잉, 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기다리자 휘청휘청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가방에 있던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현관문 저쪽 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도 민박집 주인이라는 자가 도어 스코프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겠지. 긴장감이 허파 안으로 스며들었다. 짐짓 여유로운 목소리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계십니까. 문 좀 열어주시죠.” 그제야 끼익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술에 취한 듯한 남자가 경계의 빛을 띠며 문틈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보였다. “누구슈?”, “예, 여기 투숙객 중에 김미경씨라고 있죠? 제가 미경이 오빠예요. 잠깐 미경이 좀 만나러 왔습니다.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잠깐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김미경? 그런 사람 없는데.” 그러더니 없어, 없어, 하며 막무가내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 “저기요, 잠깐만요.” 나는 왼쪽 발을 슬쩍 현관 안으로 밀어넣었다. 당연히 겁이 났지만 이제 와서 “앗, 그런 사람이 없군요. 실례 많았습니다” 하고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아니라고? 하긴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 <라우라 화이트가 사라진 밤>을 읽어주시길. 이번 회는 나에게 주어진 지면이 너무 짧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