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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01 19:47 수정 : 2017.11.01 19:53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일러스트 이민혜
아버지는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그게 평생의 콤플렉스였다고 언젠가 지나가듯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 건지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았다. 안방에도 거실에도 화장실에도 눈이 닿는 곳에는 전부 책이 꽂혀 있었다. 1980년대에 어지간한 집이라면 약속이라도 한 듯 갖춰놓았던 백과사전이나 세계문학 전집은 물론이고 계몽사에서 나온 동화 시리즈도 기억이 난다. 전부 아버지가 구입한 책이다. 과학책, 무협지, 추리소설도 빼곡했다. 덕분에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좋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이제 슬슬 아버지가 사 둔 책 말고 내가 사고 싶은 책의 목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렵에 우리 집은 가세가 기울어졌다고 할까, 형편이 나빠져서 사고 싶은 책이 있다고 내키는 대로 살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사업이 부도가 났던 것이다. 집안 곳곳에 압류 딱지가 붙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야 했다.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써먹지 않을 법한 흔해빠진 이야기다. 나는 이모네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결혼 전에 우리 가족과 함께 살기도 했던 이모는 혹시라도 내가 엇나갈까 봐 걱정스러웠는지 이것저것 살뜰하게 신경 써 주었다. 용돈이며 교재비 얘기도 언제나 먼저 꺼내고 점심과 야간 자율학습 전에 먹을 도시락 반찬도 매번 다르게 쌌다. 덕분에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공부에 뜻이 없어서 교과서 대신 늘 쓸데없는 소설이나 들여다보긴 했지만.

아버지가 잔뜩 산 책
내 유년의 기쁨

학교생활이 힘들어진 건 이듬해부터였다. 당시 어머니는 아무에게도 기별하지 않고 몰래 수원에 머물렀는데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빚쟁이들이 마침내 내가 다니는 학교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궁색해 보이는 중년 여자, 축구부 감독처럼 무섭게 생긴 아저씨, 허름한 복장의 부부가 번갈아 가며 나타났다. 물론 일말의 송구함을 느끼긴 했다. 그분들도 피 같은 돈을 떼이고 얼마나 억울했겠나. 하지만 수업을 받고 있는 나를 교실 밖으로 불러내 “네 엄마, 어디 있느냐”고 윽박지른다 한들 내가 “아, 피해자 분들이시군요. 큰아들로서 어머니를 대신하여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행히도 제가 저희 어머니의 거처를 알고 있어요. 현재 수원으로 도피하여 모처에 거주하고 계십니다”라고 고분고분 털어놓을 리 없잖은가.

다짜고짜 호출이 며칠에 걸쳐 반복되자 나도 피곤해졌다. 학교에 가는 게 귀찮아졌다. 공부로 입신양명할 것도 아닌 마당에 계속 다녀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하루는 등교하는 척 이모네 집을 나와서 샛길로 빠졌다. 딱히 목적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디든 적당히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곳이면 족했다. 돈이 없으니 비용을 지급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광진구의 대원고등학교 근처에 내가 프리패스로 통과할 만한 곳이 어디일까. 걸어서 갈 수 있고 입장료가 무료라면 어린이대공원이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공원에 앉아서 책가방에 넣어 온 소설책을 읽고 도시락을 까먹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뚱뚱한 비둘기만 잔뜩 있었다. 처음 해본 무단결석이었다.

그렇게 연달아 3일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그사이에 집으로 기별이 오진 않았던 모양이다. 담임선생님이 전화했다면 이모가 뭔가 이야기를 했겠지. 집안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계속 빠지면 그건 또 그것대로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나흘째에는 학교에 나갔다. 이상했던 건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누구 하나 “너,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먼저 물어본 건 나였다. “학교에 별일 없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는 처음에 친구들이 짜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게다가 “출출한데 매점 가서 라면이나 먹고 오자. 어제는 네가 샀으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겁하고 말았다. 나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어제 내가 학교에 나와서 라면을 샀다고?”, “잠 덜 깼냐? 네가 한턱 쏜다면서 쫙 돌렸잖아.”

나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수업을 들었다. 물론 선생님의 설명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서 최근 3일간의 족적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따져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내가 어린이대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와 똑같이 생긴, 심지어 목소리까지 흡사한 인간이 출석을 하고 빚쟁이들의 윽박지름을 견디고 친구들과 어울려 라면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친 후에 사라졌다는 거다. 그것도 3일 내내.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이어가자니 나중에는 웃음이 나왔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학교 근처 오락실에 들렀다. 그 무렵 내가 재미를 붙인 건 대전형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Ⅱ’였다. 이 게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존의 격투 게임과는 외양부터 남달랐다. 1레버와 2버튼이라는 종래의 방식과 달리 1레버와 6버튼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버튼이 여섯 개나 필요한 이유는 손기술과 발기술의 강약을 조절하기 위해서인데 그만큼 섬세하게 조작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또한 ‘스트리트 파이터Ⅱ’에 등장하는 여덟 개의 캐릭터는 모두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격투 기술과 필살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켄’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했다. 켄의 기술을 마스터하자 터프한 모습의 가일과 옆트임이 확실하게 들어간 치파오 복장의 춘리에게 푹 빠졌다.

어머니 사업 망해
빚쟁이 학교로 오는 등 고통스러워

여덟 개 캐릭터의 복잡한 커맨드(동작을 지시하는 명령)를 효과적으로 마스터하자 동전 하나만 있으면 온통 내 세상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Ⅱ’가 전체 게임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그곳은 나에게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3일을 쉬는 동안 못했던 실력 발휘를 할 요량으로 찾은 오락실에는 여전히 “어류겐”과 “아도겐”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일을 당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나를 보더니 “형, 나랑 한 판 더 해요”라며 손을 잡아끄는 게 아닌가. 어라, 하고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가 아는 놈인가. 아닌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놈이다.

“저기, 잠깐만. 너 나 아니?” 아이가 멈칫, 하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야, 형, 어제 나랑 붙어서 내리 삼십 판이나 이겼잖아요.”, “어제? 내가?”, “와, 진짜. 복수전 하고 싶으면 오늘 돈 더 많이 가지고 오라면서요.”, “사람을 잘못 봤겠지, 나는 어제 여기 안 왔는데.” 그러자 아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무서운 소리를 던졌다. “참내, 변우민이랑 똑같이 생겼다고 내가 변씨라고 부르니까 내 뒤통수 때렸잖아요. 기억 안 나요?” 학교에서 나는 ‘변씨’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탤런트 변우민과 얼굴이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등판이 오싹해져서 허겁지겁 오락실을 나왔다. 어둑어둑한 저 골목 어딘가에서 ‘그 인간’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현듯 어린 시절에 사촌 형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촌 형이 상병 계급장을 달고 혹한기 훈련을 받던 중에 겪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날따라 눈이 엄청 내렸어. 우리는 행군을 하던 중이었거든.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 거야. 그래서 대열을 이탈했지. 근데 돌아와 보니 부대원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고.” 가슴이 철렁해서 한참을 뛰어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20㎏이 넘는 군장을 메고 꽁꽁 얼어붙은 산길을 뛰느라 숨이 턱까지 차고 정신은 나갈 지경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헤맸을까. 눈이 쌓인 바위 근처에 사람 그림자가 있더란다. 처음에는 같은 부대원인가 싶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하지만 찬찬히 주의해서 들여다보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제 금방 맞춰 입고 온 듯한 전투복을 입고 있더라고. 군장도 새것처럼 깨끗하고. 얼굴은 철모가 그늘이 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슴에 달린 계급장이 보였어. 상병이야. 나랑 똑같았지. 한데 내가 다가가기 전에 그쪽이 먼저 알아차렸어. ‘누구냐’ 하고 총을 겨누더라. 나는 반사적으로 ‘상병 강성민’이라고 대답했거든. 그러자 병사가 총을 내리고 다시 찬찬히 쳐다보며 묻는 거야. ‘내가 강성민인데. 누구야, 너.’ 그러더니 내 쪽으로 다가오는데, 얼굴이 나랑 똑같이 생긴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우리는 잠시 서로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 기가 막혔지. 그때 그자가 나한테 따뜻하게 데워진 전투식량을 스윽 내밀더라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걸 받아먹을 생각이 나더라. 빈속에 눈을 맞으면서 몇 시간을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따듯한 게 들어가니까 몸이 무거워지더라고.”

그 순간 사촌 형은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겨우 오 분이나 십 분 정도. 퍼뜩 눈을 떴더니 펑펑 내리는 눈 속으로 멀어져가는 병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순간,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어.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자의 차림새가 조금 전까지의 내 모습이었거든. 그래, 땀에 푹 젖었다가 얼어붙어 서리가 내린 전투복을 입고 있었어. 일어나서 내 몸을 더듬더듬 만져보니 멀쩡한 전투복에 전투화도 방금 갈아 신은 것 같은 느낌이더라. ‘어이, 어이’ 하고 내가 불렀거든. 아무리 그래도 강성민 상병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진 못하겠어서. 그랬더니 그자가 씩 웃으면서 나를 향해 경례하는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유는 몰라. 하지만 그자가 나를 도와주었다는 건 분명해. 덕분에 살았지. 그 일이 아니었으면 나는 낙오해서 얼어 죽었을 거야.”

무단결석 후 3일 만에 학교 가니
또 다른 내가 있었다고

당시에는 사촌 형이 나를 겁주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군대가 얼마나 힘든지를 과장해, 그걸 듣고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어른들의 돼먹지 못한 심리 같은 거. 한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도 황당한 일을 겪긴 했는데 제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얘기해봤자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 테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나한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비슷한 심정으로 들려주었던 게 아닐까, 아마도. 그렇다면 사촌 형이 만났다는 ‘그자’와, 내가 학교에 나가지 않는 동안 나타난 ‘또 다른 나’의 정체는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의 정체가 궁금한 형제자매님들은 아사다 지로의 소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을 읽어주시길.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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