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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27 20:52 수정 : 2017.09.27 21:00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들이 보내는 메일이나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이러저러한 내용의 글을 썼는데 출판이 가능한지 여부를 타진해봐 줄 수 있느냐는 것이 용건이다. ‘북스피어’처럼 조그만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런 제의를 해주는 것 자체가 무척 고맙다. 하지만 내가 만드는 책은 대부분 번역서인데다가 장르문학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글을, 제아무리 내용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선뜻 출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작가 지망생들로부터 굉장히 많은 연락을 받았던 어느 한때가 있었다. 김탁환 작가의 소설 <거짓말이다>를 출간하고 그와 관련한 기사와 인터뷰가 여러 언론에 앞다투어 보도되었던 지난해 여름에 그랬다. ‘세월호’를 다룬 첫 번째 픽션이어서인지 독자들의 관심이 컸고 판매도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자 이전보다 몇 배나 되는 연락이 출판사로 쇄도했다. ‘쇄도’라고 하니 다소 거창한 감이 있는데 그 무렵에는 정말 ‘이런 게 쇄도구나’ 하고 느꼈다.

노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낯선 여인의 방문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더위도 한풀 꺾이고 슬슬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굳이 표현하자면 ‘가을의 첫날’이라 해도 무방한 계절로 접어들었을 무렵의 일이다. 그날, 누군가 출판사로 찾아왔다. 어느 아파트 9층에 자리한 우리 사무실은 현관에서 초인종을 눌러야 출입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잡상인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차량 통제도 제법 엄격하게 하는 편이다. 나는 처음에, 출입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호수의 방문객을 따라 들어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키는 170㎝가량 됐을까. 파스텔 톤의 노란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그와 흡사한 노란색 카디건에 도트 무늬가 새겨진 치마를 입고 있었다. 걷어 올린 왼쪽 소매 아래로,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라틴어를 새긴 듯한 문신이 보였다. 뚜렷하게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전체적으로 마른 체격이었지만 누가 보기에도 미인이라 여길 만한 타입이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핸드백치고는 커 보이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여기가 북스피어 출판사인가요?” 마침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고 나는 1층으로 내려가 담배나 한 대 피울까 싶어서 주섬주섬 신발을 꿰어 신던 차였는데 그녀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굉장히 낭랑한 목소리였다. 성우라고 해도 믿었을 만큼. “아, 무슨 일로… 오셨죠?” 나는 왠지 모르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사장님을 좀 뵙고 싶은데요.” 말은 부탁의 형식을 띠었지만 상대의 눈빛에는 ‘당신이 사장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내 수업을 들었나. 낯이 익다고 느낀 건 그저 미인이기 때문일까. “전데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아파트니까 당연히’라는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구두를 벗었다. 자매님이 성큼성큼 걸어서 거실에 있는 테이블 의자에 앉는 동안 나는 허둥거리며 냉장고에서 생수 한 통을 꺼내 컵에 따랐다.

일반적으로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오면 직원 중에 누군가는 나와서 인사를 건네는데 모두 바쁜 탓인지 잠자코 있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건 나중에 깨달았다. “실은 제가 소설을 한 편 썼어요.” 가방에서 꺼낸 원고 뭉치는 상당히 두툼했다. “읽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읽어봐 달라는 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런 식으로 투고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런 식으로 투고를 받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태조 왕건이 신하들 앞에서 지었음직한 미소를 띠며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꼭, 직접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사장님이 읽어봐 주시면 좋겠어서.” 나의 반응에 상관없이, 이내 자신이 쓴 글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30여분에 걸쳐 내가 들은 내용을 요약하면,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남자의 흔적을 따라온 여자가 자살하기 직전에 남자가 묵었던 펜션에서 혼자 기묘한 밤을 보내게 되는 이야기다.

확실히 내가 좋아할 만한 분위기의 소설이긴 하다. 하지만 다 듣고 나서 맨 처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오줌이 너무 마렵다. 목이 타서 계속 물을 마셨는데 중간에 말을 끊을 수가 없어서 참고 있었다. 어쩌면 으스스한 이야기 덕분에 이뇨작용이 활발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군요. 재미있어 보이긴 하는데, 저는 잠깐 손 좀 씻고 올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후다닥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소설 원고 들고 온 그 사람
펜션에서 보낸 기묘한 밤 얘기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며 거울을 쳐다보았다. 자살한 남자가 묵었던 펜션에서 홀로 기묘한 밤을 보냈다니, 본인의 경험담일까. 어쩐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서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가서 물어봐야겠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커다란 핸드백과 구두도 보이지 않았다. 원고 뭉치만 덩그러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이상한 건 노란색 카디건이 의자에 걸려 있었다는 거다.

“좀 전에 오신 손님, 어디 가셨나?” 나는 옆방에 있는 직원들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손님이요?”, “누가 오셨었어요?” 두 명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에게 되물었다. “방금 전까지 나랑 얘기하던 여자분 말이야.”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예에?”, “사장님, 아까 전화 통화하신 거 아니었어요?” 나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우리 사무실은, 거실에서 아무리 작게 얘기해도 옆방에 훤히 들릴 정도로 코딱지만한 아파트다. 방문도 전부 활짝 열어놓고 일한다.

나는 잠깐 동안 멍하니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사장님, 왜 그러세요, 무섭게.”,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더 무서워졌다. “누가 왔으면 저희가 몰랐을 리 없죠.” 한 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몰랐을 리가 없지. 그래서 아까 손님이 왔는데 아무도 나와 보지 않기에 의아하다고 여겼던 거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의자에 걸린 노란색 카디건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원고 뭉치 위에 놓인 명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름과 이메일 주소,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름은 이고은, 전화번호는 핸드폰이 아니라 02로 시작하는 집 전화번호였다.

그날, 직원들이 퇴근한 사무실에서 나는 늦게까지 원고를 읽었다. 대개 투고 원고를 읽을 때는 어딘지 모르게 산만해져서 집중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건 전혀 달랐다. 조금만 손을 보면 당장 출판해도 될 만큼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문장이었다. 원고지로 계산하면 1200매 정도가 될까. 장편소설로는 이상적인 분량이다. 이튿날 나는 명함에 인쇄되어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네 번 정도 울리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여기는 북스피어 출판사예요. 혹시 이고은씨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어렴풋이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 실례지만….” 목소리의 톤으로 미루어 이고은씨의 어머니일 거라 짐작했다. “우리 고은이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가요?”

“네, 실은….”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하며 원고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반응이 떠올라 다소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상대는 거의 알아들은 듯했다. “그랬군요. 일삼아 전화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저는 고은이 엄마예요.”, “아, 어머니시군요. 제가 한번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돌려드릴 것도 있고.”, “어머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아무 때고 편하실 때 저희 집에 와주세요. 언제라도 좋습니다.” 어머니라는 분은 말을 마친 뒤, 행복한 듯 쿡쿡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일지, 직접 찾아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튿날 오후에 댁으로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명함에 적힌 주소지는 내가 살고 있는 마포에서 멀지 않았다. 차로 가니 이십분쯤 걸렸다. 자매님의 집은 거창한 저택들이 즐비한 고급 주택가 한구석의, 주위의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조건물이었다. 이런 집이 어떻게 아직도 재개발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차에서 내려 현관 옆에 붙어 있는 구식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마당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제 나와 통화한 바로 그 목소리였다.

명함 주소지로 찾아갔더니
“다 알고 계시지 않나요?”

“처음 뵙겠습니다. 어제 전화드렸던 사람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저희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저’가 아니라 ‘저희’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 있는 걸까. 역시 어제 나를 찾아온 이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저, 고은씨는 지금 어디에….” 고은씨의 어머니는 그것도 몰랐느냐며 놀리듯이 한 손으로 가볍게 입을 가리며 쿡쿡하고 웃었다. “어머나, 원고를 읽으셨다면 지금쯤 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그 순간, 어제 읽었던 원고의 어느 한 대목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런 내용이었다.

“무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반드시 이 세상의 조리에 따라 쓰이고 있다. 이해하기 쉬운 이론이 보였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작품에는 아마 그런 건 없을 것이다. 단지 막연하게 죽은 자와 산 자가 이어지고 있을 뿐, 왜 이어지고 있는 건지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공포에 명확한 인과관계를 요구하는 사람은 ‘왜?’라는 질문으로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 ‘왜?’에 대답할 수 없고, 바로 그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쓰고 싶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대관절 어떻게 귀결될지는 이 글을 마주할 여러 형제자매님들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두도록 하자. 그래도 정히 궁금하다면 고이케 마리코의 소설 <괴담-서늘한 기척>을 읽어주시길.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글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일러스트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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