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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13 19:58 수정 : 2017.10.01 10:47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다니던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실업자가 됐을 때 제일 먼저 했던 결심은 이 나라를 벗어나 보자는 것이었다. 주위의 친구들이 배낭여행이다 어학연수다 하며 없는 살림에 빚까지 내어 국경을 넘나드는 동안 나는 비행기 한번 변변히 타보지 못했다. 여유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호기심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내 눈으로 페루의 마추픽추를 보고 싶다거나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런 서울 촌놈, 그 나이까지 대관절 뭘 한 거냐”는 타박을 듣고 나니 묘하게 자격지심이 생기더라.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정말, 서른이 다 되도록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싶고. 나만 혼자 뒤처진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실업자가 된 김에 어디든 다녀오자고 마음먹기에 이른 것이다.

실업자 된 김에 미국행 선택

어디가 좋을까. 이왕이면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 이런저런 탐색 끝에 행선지로 결정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였다. 버클리와 스탠퍼드 같은 훌륭한 대학이 있어 학구적 분위기로 충만한데다, 유대인과 라틴계와 아시아인과 히스패닉계가 얽혀 문화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든지, 인구 규모로는 미국에서 열세 번째지만 도서 구입 순위로는 세 번째이고 ‘게이들의 도시’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창의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선택했던 것은 아니다. 되풀이하지만 딱히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는 얘기다. 왜 샌프란시스코였는가. 아는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를 끼칠 마음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한 명이라도 지인이 있는 곳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출발하기 전, 나는 몇 군데 서점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여행 계획을 짰다. 그 가운데는 ‘보더스’ 같은 대형 서점도 있었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전문 서점이었다. 그리하여 처음 방문한 곳이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위치한 ‘케이오 북스’였다. 이곳은 에스에프(SF)와 미스터리, 판타지 서적을 취급하는 헌책방이었는데 오래돼 보이는 건물 안에는 과연 펄프 잡지와 희귀한 페이퍼백(paperback)이 무척 많았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주인아주머니가 하도 친절하게 응대해 주길래 한국에서 온 출판 편집자라고 인사를 하니까, “마침 내일부터 열리는 북 페어가 있는데”라고 운을 떼며 반색하더니 북 페어에 관한 정보를 프린트해 주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인사를 잘해야.

인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촌티 풀풀 날리며 이국땅에 발을 디딘 내가 받은 첫 번째 문화적 충격이 바로 ‘인사’(人事)였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이지 인사를 잘한다. 엘리베이터나 길거리 같은 불특정 장소에서조차 눈만 마주치면 너도나도 인사를 하는 통에 처음에는 꽤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르는 사람과 이 정도로 빈번하게 인사하는 풍경을 한국에서는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사를 할 때 짓는 미소와 손짓이 자연스럽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많이 들었던 말은 “하우 아 유?”(How are you? 안녕하세요?)와 “웨어 아 유 프롬?”(Where are you from?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이었는데 하루 정도 단련이 되자 어색함이 사라지고 “파인”(Fine)이나 “아임 프롬 코리아”(I'm from Korea)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모르는 사람들끼리의 자연스러운 인사로 인해 목도하게 된 기이한 광경도 있었으니 그 얘기를 한자락 해볼까 한다. 샌프란시스코에 온 지 열흘째 되는 날 저녁, 나는 피셔맨스워프 근처의 노천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앞쪽으로는 앨커트래즈섬이 보이고 뒤쪽에서는 적당한 음색의 이름 모를 가수가 재즈를 부르고 있었다. 바람이 꽤 불었지만 춥지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파카를 입어야 할 계절인데. 카페 안은 붐비지 않아 조용했다. 옆 테이블에는 청년 한 명이 클램차우더를 먹는 중이었다. 클램차우더는 사워도(Sourdough)라는 시큼한 맛의 빵을 그릇 모양으로 파고 그 안에 해산물과 조개 수프를 넣은 음식이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청년은 곧 담배를 꺼내 물고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키가 작달막하고 오종종한 얼굴의 노인 한 명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머리는 백발이었는데 입고 있는 정장은 비싸 보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청년의 앞 테이블에 앉더니 코냑을 한 잔 주문했다. 그러고는 술을 기다리는 동안 무료한 듯 앞자리 청년을 스윽 쳐다보더니 말을 걸었다. “하우 아 유, 웨어 아 유 프롬?”이라고. 청년은 “캐나다”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마치 물어볼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두 사람은 한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가벼운 날씨 이야기부터 다가올 미국 대선이 캐나다에 미칠 영향까지. 덕분에 나는 이 청년이 대학생이며 배낭여행 중이고 원래는 라스베이거스까지 가려고 했지만 돈이 다 떨어져 내일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탈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서점 방문
주인과 즐거운 인사

웨이터가 술을 가져오자 노인은 악어가죽 케이스에서 여송연을 한 개비 꺼내 왼손에 들었다. 오른손으로는 작은 가위가 딸린 손칼을 꺼내 여송연 끝을 조금 잘라냈다. 그 모습을 보던 청년은 재빨리 노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걸로 붙이시죠.” 청년의 손에는 지포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제법 센스가 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노인이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내가 직접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뇨, 괜찮습니다. 이 라이터는 언제나 불이 잘 켜지거든요.” 노인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여송연을 입에서 떼고는 청년에게 물었다. “언제나?” “네, 불이 켜지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켜는 한은요.” 노인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청년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지그시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불이 켜지는 라이터라.”

청년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네, 언제나 켜지는 라이터죠”라며 여봐란 듯이 엄지손가락을 튕겨 지포라이터의 덮개를 열었다. 팅,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잠깐!” 노인은 피고의 변호사가 판사에게 이의 있다는 의견을 내는 것처럼 청년을 향해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노인의 음색이 아까와는 달리 한 옥타브 정도 높아졌다. “그러면 어디, 나랑 내기를 해보지 않겠소?” “내기요? 갑자기 무슨?” “당신의 라이터에 불이 붙을지 안 붙을지 내기를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떻소?” 노인의 한쪽 입꼬리가 순간적으로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나는 보았다. 혹시 이 가난한 학생에게 사기를 치려는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청년이 말했다. “글쎄요, 내기라니, 재미는 있겠지만 저는 내기에 걸 돈이 없는데요.” 노인은 여송연을 내려놓고 두 손을 짝 소리가 나도록 마주 잡으며 말했다. “내 얘기를 들어봐요. 분명 재미있을 테니까. 당신이 들고 있는 이 유능한 라이터가 연속으로 열 번,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불을 켤 수 있는지 내기해 봅시다. 난 불가능하다는 쪽에 걸겠소.” 그러자 청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는 가능하다는 쪽에 제 돈 1달러를 걸죠.”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오. 나는 당신에게 정말 유리한 내기가 되도록 해주고 싶소. 자, 들어봐요. 당신은 라스베이거스에 가고 싶지만 돈이 모자라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잖소. 나는 부자요. 이 지갑에 든 현찰만 해도 5000달러가 넘지. 내가 지면 이 지갑을 통째로 드리리다.”

오, 이것은 흡사 영국 소설가 로알드 달의 소설 <남쪽에서 온 사나이>에서나 등장할 법한 제안이 아닌가. 청년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내기를 하고 싶어도 저는 1달러밖에 없어서요.” “다른 걸 걸면 되잖소. 5000달러에 상응할 만한 걸로 말이오.” “저한테는 그런 값비싼 물건이 없습니다만.” 그러자 노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당신이 쉽게 내줄 수 있을 만한 게 있지.” “뭔가요, 그게.” “당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이오.” 일순 카페에 정적이 흘렀다. 청년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대체 어떻게 새끼손가락을 가져가겠다는 거냐고 청년이 묻자, 노인으로부터 자신이 직접 자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 노인과 청년 대화 엿들어
노인의 제안 듣고 놀라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이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청년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노인은 실소했다. “허허, 아까는 불이 반드시 켜진다고 자신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런 유리한 내기를 하지 않겠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그럼, 없던 걸로 합시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이 천연덕스러웠던 데 비해 청년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점차 고조되어 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가 하면 테이블을 두드리며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청년이었다. “아까 그 내기 말인데요.” 노인은 여전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지면, 제 손가락을, 어떻게 자르겠다는 건지?” 노인이 건조한 음색으로 말했다. “승부를 하기 전에 당신 손을 테이블에 묶어두고 나는 칼을 든 채 서 있다가 라이터의 불이 한 번이라도 켜지지 않으면 그 순간 손가락을 자르는 거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서 손가락을 자를 순 없으니 내기를 할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방으로 가자고 노인은 덧붙였다. 청년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가만히 마주보았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 말라는 뜻으로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그러자 청년이 마음을 정했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죠. 내기.” 그러자 노인은 “좋아” 하고 말하며 이번에도 양손을 짝 소리 나게 마주쳤다. 바로 그때, 카페 입구 쪽에 나타난 부인 한 명이 노인을 향해 느닷없이 돌진해 왔다. 그녀는 노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욕지거리 비슷한 말을 쏟아냈다. 저러다가 노인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노인을 의자에 패대기쳤다. 잠시 숨을 고른 여자가 청년과 나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뭔가 이상한 제안을 하지 않았나요? 제 남편인데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혹시라도 불쾌한 말을 들었다면 사과드려요.” 여자는 노인의 테이블에 놓인 계산서를 잡기 위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그 손에는, 손가락이 네 개뿐이었다.

글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일러스트 이민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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