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이금이 지음/사계절(2016) 2019년은 3·1 만세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왕이면 관련된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 뒤적거리다 이금이의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떠올렸다. 3·1 운동 다음해부터 해방정국까지를 배경으로 두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장대한 서사를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의도와 맞을까를 가늠질하던 마음은 어린 수남의 한 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만석지기 윤형만 자작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 채령이 여덟 살 생일을 맞자 또래 계집아이를 몸종으로 선물하려 한다. 그러나 미리 정한 소작인의 딸이 가기 싫다고 우는 사이 곁에 있던 어린 수남이 당돌하게 형만에게 말한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수남의 운명을 바꾼 말이자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게 하는 말이다. 이금이는 데뷔한 지 30년이 넘는 중견작가다. <너도 하늘말나리야>, <유진과 유진>, <밤티마을> 3부작 등 대표작도 여럿이다. 허나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읽으며 이금이의 대표작이 바뀌겠구나 싶었다. 그만큼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논 서마지기 값에 채령의 몸종으로 팔려온 수남의 행보는 이후로도 여러 번 독자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교토에서 유학하던 채령이 독립 운동하던 정규와 사랑에 빠지고, 자금을 대었다는 혐의를 받게 되자 수남의 인생은 또 출렁인다. 아버지 윤 자작은 채령 대신 수남을 황군여자위문대에 보낸다. 이제 수남은 윤채령으로 살아야 한다. 한편 채령은 일본인으로 신분을 바꾸고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던 준페이와 위장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다. 천신만고 끝에 황군여자위문대에서 도망친 수남은 하얼빈으로 간다. 존스 부부의 집에서 일하다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수남은 이번에도 “절 미국에 데려다 주실 수는 없나요?”라고 부탁한다. 소학교도 나오지 못한 수남은 비록 채령의 신분으로 위장했지만 뉴욕에서 대학을 다닌다. 수남이 그 작은 몸을 이끌고 일본과 중국을 거쳐 미국까지 갈 수 있었던 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결코 꿈꿀 수 없었던 윤채령의 삶에 매혹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아쉬움도 든다. 적군과 아군이 분명한 시절임에도 답답한 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수남은 자신이 어떤 길을 가는지조차 모르고 매번 운명에 뛰어든다. 수남이 사모하는 강휘도 유약하기는 매한가지다. 오히려 친일파의 딸인 채령이 당돌할 만큼 자신감이 넘친다. 수남을 좀 더 역사의식이 충만한 인물로 그릴 수는 없었을까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답을 알게 된다. 일제 강점기일지라도 삶은 결코 이분법적 도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변화는 더디고 느릴 따름이다. 운명이 뒤바뀔 만큼 거센 역사의 파고 앞에서 누구랄 것 없이 욕망과 이익을 따를 뿐이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는 그러니까 역사소설이자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중고등학생.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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