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김태호 지음, 노인경 그림/문학동네(2016) 어쩌다 보니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어린이 책을 연달아 읽었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시리즈도 이번에 전권을 읽었다. 피터라는 토끼가 워낙 유명하지만 시리즈에는 고양이, 개구리, 고슴도치, 다람쥐 등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물 의인화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뿐 인간의 행태를 철저하게 반영한다. 피터는 토끼지만 엄마의 말에 순종할 것인가 혹은 본능대로 금지된 곳을 탐험할 것인가 하는 어린 시절의 발달 과제를 반영하는 아이로 그려진다.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 주인공들도 하나같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의 세련된 태도를 보여준다. 김태호 작가의 단편집 <제후의 선택>에도 동물이 등장한다. 한데 정형화된 동물 이미지를 보여주며 교훈을 전하는 이솝우화 스타일도, 어린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도 아니다. 익숙한 옛이야기들을 여러 번 꼬아 완전히 새로운 우화로 들려주거나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동물의 마음을 전하는 식이다. 예컨대 고전소설 <토끼전>의 별주부 자라는 단편 ‘남주부전’에서 해양 심층수를 제공하는 정수기회사 구 과장으로 등장한다. 구 과장은 실직한 후 집에서 살림을 하는 아빠에게 취직을 시켜준다고 꼬여 용궁으로 데려간다. 토끼 띠 아빠는 사회생활 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간이랑 쓸개를 다 내주었기에 간이 없다. 한데 알고 보니 용궁에서 찾는 건 간을 잘 맞추는 사람이었다. 간 맞추는 실력이 뛰어난 아빠는 용궁의 파격적 스카우트 제안을 거부하고 집으로 온다. 아빠의 기를 살리는 현대판 토끼전이라 할 만하다. 단편 ‘제후의 선택’ 역시 손톱 먹은 쥐에 관한 민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전혀 다른 울림을 지닌 이야기가 되었다. 이혼을 앞둔 제후의 부모는 집과 차와 통장 등 재산을 나누는 데는 적극적이지만 정작 제후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함께 살자고 하기는커녕 도리어 제후에게 누구랑 살지 결정하라며 선택을 미룬다. 제후는 민담에서처럼 자신의 손톱을 흰쥐에게 먹여 두 명의 제후를 만든다. 한 명은 아빠랑, 또 한 명은 엄마랑 살게 할 작정이었다. 고양이에게 발각되어 두 명의 제후가 모두 흰쥐로 돌아가 버리자 엄마는 “우리 제후는 어디에 있는 거야”라며 뒤늦게 찾는다. 이야기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진짜 제후의 손가락을 묘사하며 끝이 난다. 제후의 손끝은 “모두 빨갛게 멍울이 져 있었다. 손톱을 너무 짧게 잘라서 손톱 밑 살들이 전부 부어올라” 있었다. 제후는 손톱이 이상하게 아물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책을 덮고 나니 동화 속 어른들이 하나같이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히려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부모를 찾아간다. 그사이 아이들은 손톱을 물어뜯었을 테다. 어른들이 고개를 숙여 아이들의 손톱을 살피기만 해도 많은 문제는 해결된다. 초등 5~6학년.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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