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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4 06:02 수정 : 2019.06.14 19:46

[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골든 에이지
김희선 지음/문학동네(2019)

삼십몇 년 만에 한국 축구팀이 20살 이하(U-20) 월드컵 대회의 4강에 진출한 새벽에 굳이 축구공의 역사에 대한 기나긴 거짓말(이라고 쓰고 뻥이라고 읽는다)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사실 읽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일 년에 몇 번 국가대표 팀의 에이(A)매치 경기 때나 잠시 축구에 관심을 두는, 누가 봐도 냄비팬인 내가 축구공의 역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자, 금방 달아올랐다 금방 식는 성향의 얄팍함이나 탄로날 뿐이니, 두 시간 남짓의 축구경기를 즐기려면 너무 쉽게 국가주의 마케팅에 빠져드는 한심한 꼴을 확인하지 않는 편이 좋다. ‘공의 기원’이라니, ‘그깟 공놀이’에 너무 과분한 사색 아닌가.

그래도 읽고 말았다. 1872년 영국의 토마스 굿맨이 만든 축구공으로부터 한국의 박흥수가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굿맨 앤드 박 볼 컴퍼니’를 세우기까지의 역사를(‘공의 기원’). 런던 뒷골목의 구두공장에서 탄생한 축구공이 어린 노동자들에 의한 수제 공으로 팔려나가다가 마침내 로봇들에 의해 대량생산되기까지의 역사. ‘그깟 공놀이’에 이렇게 유장한 역사가 서려 있다니, 하고 짐짓 놀라는 척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영국 노동자들의 오락에서 출발한 축구가 어떻게 스포츠 마케팅의 선두주자로 전 세계에 흥행하게 되었는지, 제국주의자들은 문명을 전달한다는 명분으로 물자와 인력을 약탈했고, 동양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스뽀-츠’는 풍요한 여가의 상징이자 문명의 동의어이기도 했다는 것을.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라는 근대의 슬로건이 어떻게 ‘체력은 국력’이라는 슬로건으로 변하면서 국가주의의 선전물이 되었는지를. ‘토마스 굿맨’과 ‘굿맨 앤드 박 볼 컴퍼니’가 실제로 존재하든 말든, ‘공의 기원’은 곧 ‘노동의 역사’이자 ‘자본주의의 역사’이며 ‘제국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김희선 소설을 읽는 첫 번째의 재미는 역시 황당할 정도의 기발한 상상력과 그것을 멀쩡한 이야기로 묶어내는 구성력에 있다. 그러나 그 상상력에 기죽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에 대한 실감도 그 재미에 못지않다. 달에서 온 거대 토끼가 스웨덴의 한림원을 장악한다는 상상은 황당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18인의 노인이 선정한 노벨상에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가 들끓는 광경은 또 황당하리만큼 사실적이다.(‘18인의 노인’) 남대서양을 떠돌던 나룻배가 버뮤다 삼각지대로 빨려 들어가 동해 앞바다로 떠오른다니 말도 안 되지만, 그렇게 등장한 난민들을 허구라고 할 것인가.(‘해변의 묘지’) 사실과 허구가 박자를 맞추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황당하지만 사실이야’,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되지’라는 속삭임으로 독자를 유혹하고 긴장시킨다.

물론 나는 드디어 결승에 오른 축구팀의 경기를 보기 위해 냉장고에 맥주를 채우고 경기 전날에는 미리 낮잠을 자 둘 것이다. 스포츠 마케팅과 스타 시스템과 국가주의가 축구를 괴롭혀도 게임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황당한 허구와 현실의 실감이 뒤섞이고 거기에서 다음의 이야기가 출몰하여 네버엔딩 스토리의 마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이것이 축구인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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