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편혜영 지음/문학과지성사(2019)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한 순간의 시간도 가벼이 하지 말라. 대조와 대구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끝까지 서술되어야만 교훈이 된다. 소년이 학문을 이루고자 하고, 짧은 시간이 쌓여 어딘가에 이른다고 믿을 때만 학문의 어려움도 시간의 소중함도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다. 그래서 ‘소년이로’에서 툭 끊긴 문장은 당황스럽다. 목표도 방향도 가르침도 없이 소년 홀로 남겨져 있는 것만 같다. 중단된 문장에 외롭다가, 막막해지다가 불현듯 ‘소년’과 ‘늙다’라는 말의 조합이 기괴하게 느껴진다. 통상 자란다고 하지 않나, 소년에 대해서는. 주요 사건을 추려서 요약해 놓은 줄거리로는 소설을 다 말할 수 없다. 편혜영의 소설은 특히 더 그렇다.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층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떨어진 이불을 피하려다 척수마비의 부상을 입거나, 한밤중의 교통사고로 온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거나, 부모가 죽거나 파산하거나, 예상 못한 사고라 해야 할 불행한 사건들은 계속 이어지지만 소설은 그것 자체가 불행은 아니라고 말한다. 단문의 문장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과 연쇄되는 불행의 작은 원인과 예측할 수 없는 결과들을 건조하고 고요하게 반복한다. 느닷없는 사고의 한중간에서 인물들은 불안의 정체와 대면하기 위해 내면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고 숨을 죽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큰 집의 고요가 어둠과 함께 밀어닥쳤다.” “유준은 제 아버지를 바라보는 일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소년이로’) 처음에는 갑자기 밀어닥친 고요와 어둠으로, 그 다음에는 아버지를 꼼짝 않고 쳐다보는 아들의 뒷모습으로 유준 아버지의 죽음은 감지된다. 유준의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그것을 발견하고도 도망쳤던 소진의 불안이나 거기에서 연쇄된 유준의 불행과 소진의 죄책감마저도 이 고요하게 밀어닥친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고여 있다.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의 이면에서 계속해서 진행되어 온 모호한 불안의 시간이 거기에 응집된다. 한탄이나 비명, 또는 흐느낌 대신 우리는 이 고요한 침묵의 순간에 멈춰 서서 “다정함과 체념과 분노와 협잡이 뒤섞인”(‘다음 손님’) 우리의 얼굴을 읽는다. 그리고 단순화될 수 없으므로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내면이 어떻게 정지된 순간으로 장면화되는지를 알게 된다. 다정한 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외할아버지를 돌보다가 폐인이 되어 죽었다. ‘폐인이 되어 죽었다’라는 결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불행은 아마도 ‘다정함과 체념과 분노와 협잡이 뒤섞인 얼굴’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크고 어둡고 깊은 구덩이처럼 일상의 시간을 따르면서는 만날 수 없는 비밀이 차곡차곡 드러난다. 일상의 이면에 도사린 그 비밀들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가끔 우리는 중단된 문장처럼 보이는 소설을 펼친다. 그리고 그 중단된 문장 이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삶이 이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 이루기 어려운 학문이나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끝을 상상하는 대신 명쾌하게 설명될 수 없으므로 쉽게 발설될 수 없는 불안하고 모호한 삶을 생각하며 심호흡을 해 본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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