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린 지음/난다(2018) 드라마든 소설이든 주인공보다 주변 인물들에게 더 눈길이 갈 때가 많다. 로맨스를 보거나 읽을 때 더 그렇다. 어떻게든 선남선녀인 남녀 주인공에게 짝사랑을 바치거나 혹은 ‘남자사람친구’나 ‘여자사람친구’로 한결같이 그들 옆에 머무는 인물들.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가슴 아프고, 다른 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대를 오매불망 쳐다보는 눈길에 나도 애잔해진다. ‘서브병’이라는 전문용어가 있는 걸 보면 나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로맨스는커녕 남녀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경우도 거의 없는 소설 10편을 읽고는 느닷없이 ‘서브병’을 들먹이는 이유는 어쩐지 이 소설들이 서브, 주변 인물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저라든가 실패자라 불리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이야기,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몰락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이야기는 많다. 찬란하게 빛나지 않아도 자신만의 가치와 신념으로 세상을 지켜왔다든가, 혹은 좌절하고 밀려나고 웃음거리가 된 인생의 남모를 애환, 비애 등등. 그러나 어쨌거나 이들은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갑갑하든 어쨌든, 이야기는 이 주인공들에 의해 전개되고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어떻게 봐도 주인공일 수 없는 인물들이 소설의 인상을 결정짓는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가령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온 국민의 꿈과 희망이 된 거물 선수나, 무릎이 박살나는 부상을 겪고도 혹독한 재활을 이겨낸 축구선수는 누가 봐도 주인공이다. 그러나 성공과 집념의 화신이라 할 만한 이들을 진짜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의 행적이나 자질이 아니다. 거물 선수의 자서전을 편집하는 ‘나’, 재활에 성공한 전직 축구선수의 동료였던 ‘나’는 이 성공과 집념에 실패의 색깔을 새겨 넣는다. 말 그대로 ‘색깔’이다. 이미 자신의 임계를 깨달은 야구선수가 다음 팀으로 이적할 때 느낀 몰락감에 수백 개의 미니어처 양주병이 반짝이던 순간을 나란히 놓는다든가, 재활에는 성공했으나 재기에는 성공하지 못한 전직 축구선수의 주기적 통증을 하늘을 향해 거꾸로 솟구치는 눈송이를 통해 읽는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환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주인공의 발화나 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레이터이자 관찰자인 주변 인물들을 통해 발견된다. 양주병이나 눈송이는 주인공들의 몰락이나 은둔을 포장하거나 장식하지 않는다. 냉소도 연민도 없이 거기에 집중하여 그 자체를 삶으로 인정할 수 있게 한다. 늘 실패해 온 인물들이 만드는 리얼리티가 거기에 있다. 일이 없는 쪽보다는 너무 많은 쪽이 늘 환영인 사람, 밤을 새며 접속자 열 명 남짓의 프리미어 리그 중계영상을 간수하는 일을 묵묵히 자진해서 하는 사람. 그들은 성공이 인생의 결말이 아니듯, 실패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안다. 늘 지속적으로 조금씩 실패하는 인생을 견뎌왔으므로 그들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성공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삶의 노래로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들의 자존이 삶에서 늘 지는 편에 서 있어 온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연하게 지는 편에 서 있을 줄 아는 사람들의 존재감. 내가 ‘서브병’에 자주 걸리는 이유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책 |
평범한 실패들을 위한 노래 |
[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질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이 노래를 부르세요
최승린 지음/난다(2018) 드라마든 소설이든 주인공보다 주변 인물들에게 더 눈길이 갈 때가 많다. 로맨스를 보거나 읽을 때 더 그렇다. 어떻게든 선남선녀인 남녀 주인공에게 짝사랑을 바치거나 혹은 ‘남자사람친구’나 ‘여자사람친구’로 한결같이 그들 옆에 머무는 인물들.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가슴 아프고, 다른 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대를 오매불망 쳐다보는 눈길에 나도 애잔해진다. ‘서브병’이라는 전문용어가 있는 걸 보면 나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로맨스는커녕 남녀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경우도 거의 없는 소설 10편을 읽고는 느닷없이 ‘서브병’을 들먹이는 이유는 어쩐지 이 소설들이 서브, 주변 인물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저라든가 실패자라 불리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이야기,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몰락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이야기는 많다. 찬란하게 빛나지 않아도 자신만의 가치와 신념으로 세상을 지켜왔다든가, 혹은 좌절하고 밀려나고 웃음거리가 된 인생의 남모를 애환, 비애 등등. 그러나 어쨌거나 이들은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갑갑하든 어쨌든, 이야기는 이 주인공들에 의해 전개되고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어떻게 봐도 주인공일 수 없는 인물들이 소설의 인상을 결정짓는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가령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온 국민의 꿈과 희망이 된 거물 선수나, 무릎이 박살나는 부상을 겪고도 혹독한 재활을 이겨낸 축구선수는 누가 봐도 주인공이다. 그러나 성공과 집념의 화신이라 할 만한 이들을 진짜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의 행적이나 자질이 아니다. 거물 선수의 자서전을 편집하는 ‘나’, 재활에 성공한 전직 축구선수의 동료였던 ‘나’는 이 성공과 집념에 실패의 색깔을 새겨 넣는다. 말 그대로 ‘색깔’이다. 이미 자신의 임계를 깨달은 야구선수가 다음 팀으로 이적할 때 느낀 몰락감에 수백 개의 미니어처 양주병이 반짝이던 순간을 나란히 놓는다든가, 재활에는 성공했으나 재기에는 성공하지 못한 전직 축구선수의 주기적 통증을 하늘을 향해 거꾸로 솟구치는 눈송이를 통해 읽는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환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주인공의 발화나 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레이터이자 관찰자인 주변 인물들을 통해 발견된다. 양주병이나 눈송이는 주인공들의 몰락이나 은둔을 포장하거나 장식하지 않는다. 냉소도 연민도 없이 거기에 집중하여 그 자체를 삶으로 인정할 수 있게 한다. 늘 실패해 온 인물들이 만드는 리얼리티가 거기에 있다. 일이 없는 쪽보다는 너무 많은 쪽이 늘 환영인 사람, 밤을 새며 접속자 열 명 남짓의 프리미어 리그 중계영상을 간수하는 일을 묵묵히 자진해서 하는 사람. 그들은 성공이 인생의 결말이 아니듯, 실패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안다. 늘 지속적으로 조금씩 실패하는 인생을 견뎌왔으므로 그들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성공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삶의 노래로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들의 자존이 삶에서 늘 지는 편에 서 있어 온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연하게 지는 편에 서 있을 줄 아는 사람들의 존재감. 내가 ‘서브병’에 자주 걸리는 이유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최승린 지음/난다(2018) 드라마든 소설이든 주인공보다 주변 인물들에게 더 눈길이 갈 때가 많다. 로맨스를 보거나 읽을 때 더 그렇다. 어떻게든 선남선녀인 남녀 주인공에게 짝사랑을 바치거나 혹은 ‘남자사람친구’나 ‘여자사람친구’로 한결같이 그들 옆에 머무는 인물들.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가슴 아프고, 다른 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대를 오매불망 쳐다보는 눈길에 나도 애잔해진다. ‘서브병’이라는 전문용어가 있는 걸 보면 나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로맨스는커녕 남녀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경우도 거의 없는 소설 10편을 읽고는 느닷없이 ‘서브병’을 들먹이는 이유는 어쩐지 이 소설들이 서브, 주변 인물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저라든가 실패자라 불리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이야기,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몰락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이야기는 많다. 찬란하게 빛나지 않아도 자신만의 가치와 신념으로 세상을 지켜왔다든가, 혹은 좌절하고 밀려나고 웃음거리가 된 인생의 남모를 애환, 비애 등등. 그러나 어쨌거나 이들은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갑갑하든 어쨌든, 이야기는 이 주인공들에 의해 전개되고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어떻게 봐도 주인공일 수 없는 인물들이 소설의 인상을 결정짓는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가령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온 국민의 꿈과 희망이 된 거물 선수나, 무릎이 박살나는 부상을 겪고도 혹독한 재활을 이겨낸 축구선수는 누가 봐도 주인공이다. 그러나 성공과 집념의 화신이라 할 만한 이들을 진짜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의 행적이나 자질이 아니다. 거물 선수의 자서전을 편집하는 ‘나’, 재활에 성공한 전직 축구선수의 동료였던 ‘나’는 이 성공과 집념에 실패의 색깔을 새겨 넣는다. 말 그대로 ‘색깔’이다. 이미 자신의 임계를 깨달은 야구선수가 다음 팀으로 이적할 때 느낀 몰락감에 수백 개의 미니어처 양주병이 반짝이던 순간을 나란히 놓는다든가, 재활에는 성공했으나 재기에는 성공하지 못한 전직 축구선수의 주기적 통증을 하늘을 향해 거꾸로 솟구치는 눈송이를 통해 읽는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환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주인공의 발화나 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레이터이자 관찰자인 주변 인물들을 통해 발견된다. 양주병이나 눈송이는 주인공들의 몰락이나 은둔을 포장하거나 장식하지 않는다. 냉소도 연민도 없이 거기에 집중하여 그 자체를 삶으로 인정할 수 있게 한다. 늘 실패해 온 인물들이 만드는 리얼리티가 거기에 있다. 일이 없는 쪽보다는 너무 많은 쪽이 늘 환영인 사람, 밤을 새며 접속자 열 명 남짓의 프리미어 리그 중계영상을 간수하는 일을 묵묵히 자진해서 하는 사람. 그들은 성공이 인생의 결말이 아니듯, 실패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안다. 늘 지속적으로 조금씩 실패하는 인생을 견뎌왔으므로 그들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성공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삶의 노래로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들의 자존이 삶에서 늘 지는 편에 서 있어 온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연하게 지는 편에 서 있을 줄 아는 사람들의 존재감. 내가 ‘서브병’에 자주 걸리는 이유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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