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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23 06:01 수정 : 2018.11.23 20:11

[책과생각]서영인의 책탐책틈

여공문학
루스 배러클러프 지음, 김원·노지승 옮김/후마니타스(2017)

루스 배러클러프에 의하면 한국사회에서 ‘여공’(女工)이라는 말이 신문지상에 등장한 최초의 기록은 1919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말이지만 ‘여공’이라는 말이 그렇게 생소한 말은 아니다. 1920년대의 고무공장의 ‘여공’, 1970년대 방직공장의 ‘여공’.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인 1980년대만 해도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이 한 반에 몇 명씩은 있었다. 친구들이 인근 고등학교의 예비소집에 참가할 때, 그들은 회사에서 보낸 통근버스를 타고 단체로 그들이 다닐 학교(공장)로 갔다. 그들은 아마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여공’이 되었을 것이다. 신경숙이 <외딴 방>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이 ‘산업화 시대의 풍속화’였든 어쨌든 ‘여공’이란 말이 지금도 그리 생소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공문학’이란 말은 어쩐지 낯설다. ‘여공’이라는 존재를 문학의 주체로 선뜻 명명하기를 꺼려온 탓이다. ‘동반자 문학’이라거나, ‘지식인 문학’이라거나, ‘노동자 문학’이라거나, 작품이 재현하는 주체의 신분이나 성격을 중심으로 문학의 계보를 만드는 용어들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알기로 ‘여공’은 문학의 주체로 계보화된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여공문학’뿐이 아니다. ‘동반자’나 ‘지식인’이나 ‘노동자’ 같은 계보화된 문학의 주체는 은연중에 그 주체의 성별을 ‘남성’으로 가정하고 있으니, ‘여성’이라는 성별로 계보화된 문학은 겨우 ‘여성작가’의 문학(이전에는 ‘여류문학’이라 불렀다) 정도가 있을 뿐이다. 물론 ‘남성문학’이라는 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이다. 하필 ‘여성 주체’를 중심으로 한 하위 장르로 ‘호스티스 문학’이나 ‘기지촌 문학’ 같은 작명법이 떠오른다. 문학이 여성에게 덧입혀 놓은 오래된 관습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지음/한겨레출판(2018)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은 조선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인 강주룡을 주인공으로 채택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여성이면서 노동자였던 ‘강주룡’의 주체성을 소설이 시종일관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덜 부각된 측면이 있다. 배러클러프는 한국문학에서 ‘여공’의 재현이 ‘굴욕적이고, 비참한 존재’, ‘희생양’ 등의 감상적 해석에 기대왔다고 지적하면서 ‘여공문학’을 통해 새로운 여성 노동계급의 주체성을 의미화한다. <체공녀 강주룡>이 묘사하는 강주룡 역시 그 시대 여성들이 처한 수난과 학대에 여지없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소설은 그것을 수난과 희생의 서사가 아니라 성장과 투쟁의 서사로 역전시킨다. 아버지든 남편이든, 독립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여성이면서 노동자인 자신의 입장에서 선택하고 사랑하고 비판하고 투신했다.

박서련은 한 인터뷰에서 <체공녀 강주룡>의 배경이 되는 간도와 평양의 형상을 얻기 위해 자주 강경애의 글을 읽었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에게 ‘여공문학’이란 말이 낯선 것은 작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문학적 주체로 상상할 수 있는 전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강주룡’은 ‘여공’들의 선조 격인 인물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와서 새로운 여성서사의 상상력을 촉구한다. ‘계보’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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