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이기호 지음/문학동네(2018) 좋게 말하면 공감능력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줏대가 없는 것이겠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소설의 분위기랄까, 개성 같은 것에 나도 모르게 과하게 몰입될 때가 많다. 엄정한 객관성과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평론가가 되기란 애초부터 글러먹은 것 아닌가, 에라이. 뭐 이런 심정으로 그럴 바엔 공감능력과 감수성이라고 우기면서 소설의 분위기에 얹혀가는 평론을 쓰겠다고 작정할 때도 있는데, 그것조차 잘 되지 않으니 또 문제다. 이기호의 소설을 읽을 때 특히 그렇다. 그의 소설처럼 유쾌하고 날렵하게, 그렇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글을 써 보리라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게 또 심각해져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작가가 이전에 낸 소설집 제목처럼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의 상태. 작가의 페이스에 또 말렸다. 내내 갈팡질팡하다 말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비판적이 되어 보기로 한다. 표제작뿐 아니라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들은 ‘최미진’이나 ‘한정희’, ‘나정만’과 ‘권순찬’ 같은 고유명사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익명의 개인이 아니라 고유한 삶을 가진 특정한 누군가의 삶에 주목하면서 예측하지 못한 진실을 발견하려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식으로 개인들에 주목하는 시선은 그리하여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를 드는 편이 쉽겠다. 용산참사에 동원된 두 대의 크레인 중 한 대의 운전기사였던 나정만씨는 과적단속에 걸려 현장에 가지 못한(않는)다.(‘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그가 용산 농성현장의 진압계획을 알았을 리 없다. 또 살기에 바빠서 철거민들의 억울함과 분노에 관심을 가지지도 못했다. 경찰은 계획한 대로 크레인 두 대가 현장에 도착하였더라면 그렇게까지 희생이 커지지 않았을 거라고 발표한다. 사회적 참사의 원인으로 개인의 삶이 연루되어 있다는 전언은 양면적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애매하다. 어떤 개인적 삶의 고유한 사연들도 그것 자체로 단독적일 수 없다. 혹은 우리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주변과 개인의 삶을 탐문하지만 그럴수록 사건은 요약될 수 없는 진실로 확산되고, 그리하여 결국 미궁에 빠진다. 남은 것은 개인의 윤리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공통의 진실이란 무망하다. 우리는 모두 유죄이거나 또는 모두 무죄다. 시시때때로 무력을 토로하는 소설가의 자기반성은 사실 이 곤경을 피하기 위한 자기방어는 아닌가. 이야기는 계속된다. 나정만씨의 진술은 용산참사를 취재하는 소설가의 인터뷰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데, 어쩌다 보니 엉망으로 취해서 부서진 아이폰 때문인지, 소설을 쓸 수 없는 무력감 때문인지 울고 있는 소설가에게 역시나 취한 나정만씨의 일갈. 그런데 용산참사를 취재한다면서 왜 거기에 가지 않은 나에게로 왔냐고. 거기에 간 사람들을 취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정만과 권순찬과 최미진과 한정희 들을 경유한 끝에 우리는 더 이상 외면할 수도 도피할 수도 없는 질문과 대면하게 된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갈팡질팡하다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 서영인 문학평론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