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안재성 지음/창비(2018) 세계가 말을 만들지만 말이 세계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의 경험으로는 ‘종전’이라는 말이 그랬다. 남북정상회담 후 ‘종전 선언’이 있으리라는 예측이 나오던 때에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우리가 전쟁 중이었구나. 전선(戰線)을 앞에 두고 총을 들지 않더라도, 그동안 우리는 쭉 전쟁 중이었구나. 빨갱이야 이미 촌스럽지만, 종북이니 친북이니 끊임없이 새로운 혐오의 말이 생겨나고 적아를 구분하여 싸워 이기려고 기를 쓰는 모든 소란의 와중에 내내 피로했던 것이 내가 겪는 전쟁이었구나 싶었다. 욱일기이거나 평화 나비이거나, 또는 양심적 병역거부이거나 그것은 전후(戰後)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겪는 일이며, 하나의 전쟁은 다른 전쟁으로 연쇄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전쟁을 체험한 세대보다 체험하지 못한 세대가 훨씬 더 많은 오늘의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전쟁을, 역설적으로 종전이라는 말을 들으며 실감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실존인물 정찬우의 수기에 바탕한 소설이다. 정찬우는 일제 말기, 17살 어린 나이에 의용군에 지원했고 해방 후 여학교 교사 신분으로 또 전쟁을 겪었다. 그런 정찬우의 눈을 통과하여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다는 낙동강 12고지 전투에서 ‘종전’이라는 말을 만난다. 부대에서 연애중이라는 이유로 총살을 당할 위기에 놓인 임상욱과 전애심에게 정찬우는 묻는다. “종전 후에 결혼할 거요?” “네.” 하찮은 일로 죽이면 원한이 쌓여 못쓴다고, 흥분한 대대장을 설득하여 정찬우는 두 연인의 총살을 막았다. 이후 임상욱과 전애심은 결혼했지만 전쟁은 끝난 것이었을까. 휴전이 되고 포로교환이 있은 후 정찬우는 대한민국 정부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10년을 살고 전향서를 쓰고 출옥하여 10년을 더 살고 죽으며 그가 겪은 전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의용군 출신 정치범이 쓴 기록인지라 오래 유족의 벽장 속에 숨겨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한 평생이 온통 전쟁이었다. 그러니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종전은 오지 않았고, 그래서 평화는 더욱 멀다. ‘모든 전쟁은 나쁘다’거나, ‘나는 평화주의자’라는 말이 때로는 아무 것에도 반대하지 않고, 어느 쪽에도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전쟁, 그 참혹을 기록하는 일조차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박적 혐오, 혹은 선한 휴머니즘이라는 외면과 위안의 결론으로 종종 환원된다. 하여 전쟁을 서사화하는 일은 어렵다. 한 생애가 온통 전쟁이었는데, 그렇게 겪은 일생의 전쟁으로 반전의 사상이 단단해지는 광경을 본다. 전쟁으로 인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더 오래, 누군가의 삶을 관통하여 들여다보는 서사가 나의 전쟁을 생각하게 한다. 전쟁이 현재의 전쟁, 나의 전쟁으로 실감되지 않는다면 평화 역시 공허하고 막연할 뿐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전사도 영웅도 아니며, 무고한 희생자도 물론 아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정찬우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아직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채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전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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