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정용준 지음/문학동네(2018) 잠깐 동화처럼 천진하고 신화처럼 신비한 유토피아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세계를 창조한 신은 이름이 없지만 편의상 알파와 베타라고 부르자. 알파와 베타는 각각 하늘 위와 아래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알파는 하늘 위의 생물로 고래를 만들었고, 베타는 지상의 생물로 사람을 만들었다. 사람의 변덕을 견디지 못한 베타가 하늘의 위아래를 뒤섞어 버리자 지상에서 살 수 없는 고래를 위해 알파는 다시 바다 깊숙한 곳에 고래가 살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유토’는 고래가 사는 세계, 시간이 없어 늙음이 없고, 변화가 없어 충격도 없으며,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듣고 이해하는 세계.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유토’는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그런 ‘유토’를 다녀온 토니오의 이야기. 그래서 ‘프롬 토니오(from tonnio).’ 굳이 소설의 완성도와 서사적 설득력을 따져 본다면, 토니오가 50년 동안 머물렀던 ‘유토’의 세계는 불명확한 채로 너무 길게 서사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에 반해 시몬과 데쓰로가 겪은 이별과 상처는 너무 덜 그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도 된다. 유럽의 화산섬 마데이라 해변에서 일어난 고래의 떼죽음에 대해서도, 서두에 압도적으로 묘사된 것 치고는 소설이 별로 말해주는 것이 없다는 불만이 생기기도 한다. 결국 토니오가 젊은 시절 연인을 떠나 먼 곳을 떠돌다가 마침내 오랜 시간이 흘러 이미 죽고 없는 연인의 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요약해 놓고 보니, 내가 너무 상상력이 부족한 독자인가 싶기도 했다. 토니오는 2차대전 중에 실종되었고, 화산연구자였던 시몬은 바닷속으로 연인이 사라진 후 세상을 잃은 슬픔에 잠겼다. 지진 연구자인 데쓰로는 고베 지진으로 가족을 통째로 잃었고, 지진 연구가 지진으로부터 사람을 구하는 일에 무용하다는 생각으로 오래 고통스러웠다. 그 상실과 고통으로부터 ‘유토’가 생겨났다고 읽을 수도 있을까. 소설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시피 ‘유토피아’는 ‘좋은 곳’이면서 ‘어디에도 없는 곳.’ 그들은 자신들의 무력과 상실을 견디기 위해 ‘어디에도 없는 곳’을 애써 상상하고 또 상상해야 했을 것이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영원히 잃어버리지는 않기 위해,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 그들은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에 대해 오래 골몰해야 했을 것이다. 마치 ‘유토’를 상상해 내지 못한다면, 사라진 자들의 거처가 마련되지 못할 것처럼, 필사적으로. 내가 당신을 잃었을 뿐 아니라 당신도 나를 잃었다는 것을 알기 위해 여기에 없는 세계를 얼마나 더 상상해야 할까. 나는 여기에 있고 당신은 내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당신도 저기 어딘가에서 나를 잃은 슬픔을 견디고 있다. 그 저기 어딘가를 상상하기 위해 ‘유토’가 필요했다. 그제야 연인을 떠난 토니오가 오랜 시간 후 귀환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라진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세계 하나를 더 만들어야 했던 견딤의 시간, 타인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일의 축약될 수 없는 고통과 경이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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