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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2 20:59 수정 : 2016.10.21 08:50

서영인의 책탐책틈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정용준, 문학동네)라는 표제에 멈칫했던 것이 나뿐만은 아니리라.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소설에서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혈육’이라는 말은 당혹스럽다. 늙고 병든 아버지가 자신을 외면하는 자식에게 던지는 뻔한 대사 같은 이 표제로 설마 가족의 정이나 인륜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아버지의 안일한 질문에 대한 아들의 답은 이렇다. “어쨌든 당신은 내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표면적으로 소설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라는 가족서사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는 아버지가 만든 세계에 대응하는 아들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성 세계에 대한 아들들의 주체성을 표상하기도 한다. 아들들은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세계에 굴복(화해)하거나, 혹은 저항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열어간다. 종종 ‘친부살해’의 모티프는 아버지의 세계를 용납할 수 없는 아들들의 출사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용준 소설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이는 대신 스스로를 죽인다. 나는 이를 출구 없는 세계의 폭력과 야만을 증명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읽었다. 어떻게 해도 아버지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버지조차도 이 폭력의 세계를 만든 주체는 아니다.

유일하게 아버지를 죽이는 데 성공하는 ‘개들’의 아들이 고통을 감각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는 고아인 아들을 데려다 개를 도살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아들을 동업자로 길렀다. 폭력의 위계 아래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만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혈육’은 이미 ‘피와 살’이 된 아버지의 세계에 대해 아들이 느끼는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도살된 개들로 가득한 아버지의 세계는 끔찍하지만 아들은 쉽게 그 바깥을 넘보지 못한다. ‘무통’(無痛)의 지경에 이르러야만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세계 안에서 겪는 고통으로 인해 아들은 아버지의 세계에 맞서지 못한다. 혹은 ‘무감각’은 도살장의 세계를 견디는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도살장에는 동료들의 내장을 먹으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개들이 그득하다.

자기파괴 혹은 무감각.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무력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타고난 조건과 무관하게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차단된 세계에서, 지난날의 젊은 아버지들이 꿈꾸었던 세계가 어떻게 그들에 의해 무참하고 무력하게 버려지는지를 목격한 세대가, 이 비이성과 몰인정의 한복판을 살아가려면 어떤 희망의 단서가 필요한지 함께 모색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의 소설은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비참과 암담을 정직하게 돌파하고 있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프로이트 이래로 ‘아버지의 이름’을 둘러싼 가족서사는 고전적 레퍼토리가 되었다. ‘죽은 아버지 되살리기’의 욕망이 연출하는 요즈음의 살풍경을 목도하며 고전이 달리 고전이 아님을 새삼 실감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의 맥락에서 다시 읽힘으로써 고전은 진부한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지혜가 된다. 죽은 아버지의 이야기 대신 쉽게 죽이지도 쉽게 용납하지도 않는 아들의 이야기를 다시 펼친다. 무감각의 고통이 더욱 아픈 날들이다. 벌거벗은 시절, 소설 읽는 밤이 깊어간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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