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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09 19:27 수정 : 2016.10.21 08:52

서영인의 책탐책틈

어쨌거나 신경숙의 <오래전 집을 떠날 때>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다. 신경숙의 작품 중 좋은 작품들은 대체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거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모여 있는 불빛’ 같은 작품이 대표적 예이다. 소설 속에 재현된 가족들의 삶은 사소한 일상이나 대화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생생해서, 결코 상투화될 수 없는 가치와 의미가 그 안에서 빛난다. 글쓰기가 대상의 실제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고민은 오히려 대상을 더 깊이 주목하게 하고, 그래서 글쓰기가 불가능을 토로하면 토로할수록 소설 속의 삶들은 하나하나 독자적이며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오래 사랑하고 깊이 숙려하여 비로소 존중되는 삶이 글쓰기의 진정성과 만나는 지점에 신경숙 소설의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가 발휘되는 범위가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 신경숙 소설의 한계이기도 하다.

표절 논란으로 문제가 된 ‘전설’은 신경숙의 소설이 신변적 범위를 벗어났을 때 어떤 곤경에 처하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은 사과나무와 여인의 인상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 한국전쟁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는 부분, 전쟁으로 헤어진 젊은 부부의 이야기인 본편, 다시 종전 후의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는 마무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새롭게 주목한 부분은 역사적 배경이 서술되는 부분이다. “왜정 지나 군정 지나 이승만 정권 여러 가지 불안 요인을 안은 채 출발하다.”로 시작되는 서술은 전쟁의 원인으로 이승만 정권의 비정통성과 실정을 전제하고 있다. 역사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며 서술자의 관점과 현실인식에 의해 해석되고 배치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작가가 주로 참고한 책은 강만길의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1984)인 것 같다. 소설의 서술 부분은 <한국현대사>에서 6·25 전쟁의 배경을 설명한 부분 중 국내적 요인, 그 중에서도 남한의 사정을 따로 떼어 참조, 요약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강만길의 <한국현대사>는 진보적 관점에서 서술된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성과이며,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지향점을 뚜렷이 하고 있다. 소설에서 서술된 부분 역시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그런데 서두에서 전제된 관점을 본편이라 할 수 있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의 비역사적 행태와 미국의 개입 혹은 승인에 의해 발발된 전쟁이라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편은 ‘남자로서 할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원입대한다. 이 괴리는 크다. 그저 인용하고 참조했을 뿐 그 내용이 지시하는 현실의 구체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생기는 괴리이다. 개인적으로는 참고 출처를 소설에 명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저술에 대한 존중이라는 차원은 물론이거니와, 인용과 참조의 근거를 분명히 할 때 소설의 주제의식 역시 한층 더 구체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역사에 대한 무자각성, 무신경함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마땅하다. 이 무자각성 때문에 개인은 신비화되고 역사는 추상화되었으며, ‘전설’은 모호한 감상의 장식만 남은 작품이 되었다. 소설이 무수한 자료의 조합일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료의 맥락에 더 민감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글쓰기의 진정성을 말할 수 있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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