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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26 19:52 수정 : 2016.10.21 08:53

서영인의 책탐책틈

김소월의 <진달래꽃> 원본을 본 것은 개인 수집가 여승구 선생의 서고에서였다. 국립 근대문학관 건립을 위한 예비 조사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원본 <진달래꽃>은 문화재청에 의해 2011년 한국 근대문학 최초로 문화재로 등록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나 보급처가 다른 동시간행 이본이 있음이 밝혀졌다. 학계에서는 흔히 <진달내꽃>과 <진달내>으로 이 둘을 구분한다. 내가 본 것은 <진달내꽃>이었다.

듣기에도 고리타분한 원본 확정의 중요성 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들에게 원본 확인은 연구의 기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대중 독자들에게까지 그것이 강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시를 더 잘 읽고 느끼기 위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통로를 되도록 여러 갈래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본 <진달래꽃>이 원점으로 회귀하는 시 읽기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열리는 시 읽기를 가능하게 했다면, 그것은 몹시도 역설적인 문학의 마법이다.

가로 10.5㎝, 세로 14.9㎝의 반국판 크기, 흔히 말하는 문고판 크기의 책이 실제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은 표지를 꽉 채우는 진달래꽃 때문이다. 기묘하게 뒤틀린 바위틈 사이로 진달래꽃 한 포기가 뻗어 나와 있다. 바탕색은 묵은 세월만큼 빈티지한 인디언 핑크, 채색 없는 단색의 선화(線畵)인데 꽃그림과 표제를 채운 색은 흙빛에 가까운 자줏빛이다. 어떻게 보아도 ‘전통적 한의 정서’라거나 ‘여성적 어조’ 등의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진달래꽃’이 야생의 꽃임을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어서이다. 표지는 ‘진달래꽃’ 한편의 시만을 향해 있지 않다. ‘진달래꽃’은 시집의 중간쯤 자리 잡고 있고, 표지를 열면 처음 만나는 시는 ‘먼 후일’이다.

‘진달래꽃’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거듭 선정되고 있다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인이 아는 시의 목록 자체가 많지 않다. 기껏해야 교과서에 수록된 시, 혹은 미디어를 통해 자주 알려진 몇 편의 시 목록 중에서 가장 익숙한 시가 ‘진달래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시의 알려진 해석은 대체로 시보다 빈약하다. 모르긴 몰라도 ‘진달래꽃’을 가장 좋아한다는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이니 ‘애이불비’(哀而不悲) 같은 교과서적 문구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진달래꽃>을 처음부터 다시 읽을 마음을 먹은 것은 원본의 펄펄 살아 있는 당대성 때문이었다. 20년 국문학을 공부했다는 처지에서 보면 민망한 일이지만, 그렇게 문학은 매일 다르게 읽힌다. ‘진달래꽃’은 ‘당신이 떠나도 내 사랑은 내 것’이라는 마음의 주체성에 관한 시는 아니었는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산유화’의 꽃이 그렇게 존중받는다.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겠다는 마음자리에서 피는 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자동화된 일상 언어의 감각을 파괴하는 ‘낯설게 하기’야말로 시의 기능이라고 보았다. 한 권의 책이 90년 후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하며 ‘낯설게 하기’를 수행하고 있었다. 미친 존재감이라 할밖에.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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