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07 11:33
수정 : 2017.08.07 20:30
[듀나의 영화불평]
올해 여름엔 20세기 한국 역사를 소재로 삼은 야심작 세 편이 나왔다. 이준익의 <박열>이 가장 먼저였고 그 다음이 류승완의 <군함도>와 장훈의 <택시운전사>였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들 중 걸작은 없다. 모두 성취도가 고만고만한 수준이고 정도차는 있지만 소재를 생각하면 다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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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함도>의 한 장면. 씨제이이앤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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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논란이 되었고 문제가 심각한 영화는 류승완의 <군함도>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군함도에서 탈출한다는 설정부터 문제였다. 모두가 결말을 아는 참혹한 실제 역사에 허구의 해피엔딩을 부여하는 것은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개봉 이후의 반응을 보면 <군함도>를 만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 같지 않다.
더 나쁜 것은 <군함도>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들이 불러온 인물들이 모두 극단적으로 장르화되었다는 것이다. 오에스에스(OSS) 요원, 종로를 주름잡던 조폭, 위장한 친일파, 기타등등. 이들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개연성 있는 허구엔 어울릴 수 있어도 군함도의 실제 역사에서는 주제 자체를 갉아먹는다. 장르적 상상력이 실제 역사와 아주 나쁜 방식으로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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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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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의 <택시운전사>는 <군함도>보다 역사에 대해 예의바른 영화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카메라로 담은 독일 저널리스트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광주까지 데려간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화를 소재로 삼은 이 영화에는 과격한 역사의 변형이나 과장된 장르장치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영화가 이상할 정도로 무난하다. 실제 역사를 많이 비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여전히 실화에 기반을 둔 허구이고 힌츠페터와는 달리 자료가 남아있지 않는 김사복은 전적으로 재창조된 허구의 인물이다. 당연히 상상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한다.
문제는 그 상상력이 진부하다는 것이다. 김사복을 포함한 이 영화의 주요인물들에겐 강한 데자뷔가 느껴진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비정치적인 소시민 중년 남자이고 그의 정치적 각성이 스토리이며 주변의 조역들은 단 한 명의 예외없이 순박한 민초이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는 게 그렇게 힘이 든 것이다. 상상력으로 역사책이 다룰 수 없는 빈 칸을 생명력으로 채우는 것이 이런 영화의 의무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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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의 한 장면. 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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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영화들 중 가장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작품은 이준익의 <박열>이다. 이 영화에는 개성 넘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이 뛰어다닐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들이 있다. 단지 여기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이 캐릭터들은 이준익의 역사적 상상력을 거쳐 재창조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사의 상당부분은 실제 기록에서 따왔고 캐릭터 묘사 역시 수동적으로 그 뒤를 따른다. 보다보면 오래 전에 죽은 실존인물들에게 영화가 끌려다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영화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선 이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국 역사적 상상력의 문제이다. 기록의 뼈대 위에 어떻게 믿음직하고 생생한 허구를 덧씌우는가. <군함도>는 너무 나갔고 <택시운전사>는 지나치게 무난한 길을 택했으며 <박열>은 그런 것을 꺼낼 여유도 없이 실화에 끌려다닌다. 결국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통제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던 셈이다. 이 정도면 날 잡아 역사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된 게 아닐까.
듀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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