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안주로 전만한 게 없다. 사진은 공덕동 한 식당의 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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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동네덕후도 몰랐던 술집···주인장 극진한 배려에 감동
술안주로 전만한 게 없다. 사진은 공덕동 한 식당의 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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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본 건 주인장의 자부심
넋두리 심한 다른 술집 비교돼
하찮은 일도 정성, 그런 이 가까이 원래 종종 가던 동네 술집이었다. 술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주택가 골목 안에 조용히 스며든 술집이라 우리도 조용히 스며들어 맥주 한두 잔 마시고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최근엔 이상하게 발길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다가 며칠 전 일부러 그곳에 갔다. 사장님이 바뀌어 있었다. 메뉴판도 분위기도 싹 다 바뀌어 있었다. 엉거주춤 원래 자주 앉던 테이블에 앉아서 마른안주와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사장님은 맥주를 가져다주시면서 말했다. “안주는 좀 있다가 드릴게요. 지금은 브레이크 타임이라서요.”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밤 10시반에 브레이크 타임이라니. 그것도 술집에서. 하지만 사장님이 그렇다니까 또 그런 건가 싶어서 맥주부터 홀짝홀짝 마셨다. 맥주를 반 정도 마셨을 때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건지 사장님은 안주를 내왔다. 그리고 한참이나 자기가 이 안주들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설명했다. 이게 그렇게나 설명할 안주들인가 싶었지만 사장님이 설명해주니까 또 그러려니 하면서 들었다. 아무튼 가게에선 사장님이 왕이니까. 잠시 후 맥주를 한잔씩 더 시켰더니 사장님이 빈 잔을 들고 가며 말했다. “이 잔에 또 드려도 되죠? 설거지하기 귀찮아서.” 평소라면 “네. 그냥 그 잔에 주세요”라고 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사장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새 잔에 주세요.” 사장님은 나를 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고는 빈 잔을 싱크대에 탁 놓고, 새 잔을 꺼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로써 나는 단골집 하나를 잃어버렸군, 사장님 당신도 큰 단골손님이 되었을 사람들을 잃어버린 거라고.’ 그리고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 사장님은 나를 붙들고 자기가 원래는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또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원래는 이런 일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냥 친구들이랑 편하게 술을 마시려고 차린 거라는 둥, 낮에는 여기가 자기 작업실이라는 둥, 이야기가 길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그분은 자기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따뜻하게 먹어야 한다며 육전을 몇 번이나 나눠서 내주시는 사장님과 설거지하기 귀찮으니까 쓰던 잔에 다시 맥주를 주겠다는 사장님. 김치 하나에도 넘쳐나는 사장님의 자부심과 내가 원래는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설명하는 또다른 사장님의 자부심. 두 다른 사장님이 만들어내는 전혀 다른 두 가게의 분위기. 남편이 말했다. “예전에 동파이프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어. 냉장고에 들어가는 가느다란 동파이프를 구부리는 일. 아주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잖아. 근데 이런 일을 하면서도 꼭 그런 분이 계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잘 돌릴 수 있을까를 연구하시는 분. 자기가 이렇게 저렇게 실험해보고,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거지. 그런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뭐 진급을 하는 것도 아니야. 근데도 그런 분들이 꼭 있어.” 그렇다.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누가 보기엔 정말 하찮은 일이라도 그 일에 기어이 영혼을 불어넣는 사람들. 허름한 일도 반짝반짝 윤기가 돌도록 만들어놓는 사람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자부심으로 빛나는 표정의 사람들. 그런 표정으로 자기 일을 하는 주변의 사람들. 물론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나에게도 너무 먼 경지다. 하지만 그 경지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까이해야 한다. 그 에너지가 나에게까지 전파되니까.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또 그 육전과 그 김치를 먹으러 가겠다는 이야기다. 조만간. 얼른. 어쩌면 오늘 당장. 아, 생각만으로도 벌써 침이 고인다. 김민철 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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