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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10 20:42 수정 : 2017.05.10 21:04

술안주로 전만한 게 없다. 사진은 공덕동 한 식당의 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동네덕후도 몰랐던 술집···주인장 극진한 배려에 감동

술안주로 전만한 게 없다. 사진은 공덕동 한 식당의 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멀리서 우리 동네를 다녀간 친구가 말했다. “추천해준 그 술집 가려고 했는데, 너무 시간이 없어서 눈에 보이는 아무 데나 들어가서 마셨어. 근데 그 집 완전 맛있던데, ○○호프라고 알아?” 처음 듣는 술집 이름이었다. 나 같은 동네덕후가 모르는 호프집이라니! 나 같은 술꾼이 모르는 술집이라니! 대단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맛있는 집이라면 내가 진작 알았겠지, 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며칠 전 남편과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오늘 저녁은 또 뭘 먹나 고민하며 동네 맛집들을 꼽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친구가 말한 그 호프집이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후보로 올랐던 식당들을 모두 다 제쳐놓고 홀린 듯이 그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은 몇 되지 않고, 주방도 조그마한 그 호프집에는 생각보다 메뉴가 다양했다. 치킨부터 주꾸미까지, 모두 내게 말을 걸어오는 와중에 우리가 고른 것은 육전이었다. 이름만 들어보고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육전이여. 오늘 우리가 드디어 만나는구나.

사장님은 잘 익은 파김치와 갓김치를 통으로 먼저 내왔다. 보는 순간 직감했다. 여기 음식, 장난이 아니겠구나. 오늘 우리는 또 술을 많이 마시겠구나. 그런데 사장님은 육전을 달랑 두 장 부쳐서 내왔다. 가격에 비해 너무 적은 양이었다. 사장님은 육전을 자르며 말씀하셨다.

“우선 이거 먹고 있어요. 육전은 따뜻하게 먹어야 맛있으니까. 내가 또 부쳐올게요.”

사장님은 딱 적당한 크기로 김치를 자르시더니 육전을 도르르 싸서 각자의 접시에 내주셨다. 허름한 그 술집 분위기에서는 상상도 못한 극진한 대접이었다. 맛은 어땠냐고? 말해 뭐 하겠는가. 놀라웠다. 따뜻한 육전도 놀라웠지만, 김치가 압권이었다. 하나도 짜지 않고, 적당히 시원하니 적당히 잘 익은 파김치와 갓김치라니. 곧바로 싹 비웠다. 육전을 한 접시 더 부쳐서 내온 사장님이 그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육전이 뭐가 맛있겠어요. 김치가 맛있지.”

캬! 김치에 대한 사장님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드러난 말이었다. 버젓이 메뉴 이름을 ‘육전’으로 적어놓고는 ‘육전이 뭐가 맛있겠어요’라니. 그렇게 자부심이 있다 보니 알바생에겐 김치 하나 자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김치 하나 자르는 것까지 본인이 직접 해야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장님이었다. 그 모습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며칠 전 다른 술집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갓김치로 돌돌 싼 육전이 안주
맛본 건 주인장의 자부심
넋두리 심한 다른 술집 비교돼
하찮은 일도 정성, 그런 이 가까이

원래 종종 가던 동네 술집이었다. 술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주택가 골목 안에 조용히 스며든 술집이라 우리도 조용히 스며들어 맥주 한두 잔 마시고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최근엔 이상하게 발길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다가 며칠 전 일부러 그곳에 갔다.

사장님이 바뀌어 있었다. 메뉴판도 분위기도 싹 다 바뀌어 있었다. 엉거주춤 원래 자주 앉던 테이블에 앉아서 마른안주와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사장님은 맥주를 가져다주시면서 말했다.

“안주는 좀 있다가 드릴게요. 지금은 브레이크 타임이라서요.”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밤 10시반에 브레이크 타임이라니. 그것도 술집에서. 하지만 사장님이 그렇다니까 또 그런 건가 싶어서 맥주부터 홀짝홀짝 마셨다. 맥주를 반 정도 마셨을 때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건지 사장님은 안주를 내왔다. 그리고 한참이나 자기가 이 안주들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설명했다. 이게 그렇게나 설명할 안주들인가 싶었지만 사장님이 설명해주니까 또 그러려니 하면서 들었다. 아무튼 가게에선 사장님이 왕이니까.

잠시 후 맥주를 한잔씩 더 시켰더니 사장님이 빈 잔을 들고 가며 말했다. “이 잔에 또 드려도 되죠? 설거지하기 귀찮아서.”

평소라면 “네. 그냥 그 잔에 주세요”라고 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사장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새 잔에 주세요.”

사장님은 나를 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고는 빈 잔을 싱크대에 탁 놓고, 새 잔을 꺼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로써 나는 단골집 하나를 잃어버렸군, 사장님 당신도 큰 단골손님이 되었을 사람들을 잃어버린 거라고.’

그리고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 사장님은 나를 붙들고 자기가 원래는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또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원래는 이런 일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냥 친구들이랑 편하게 술을 마시려고 차린 거라는 둥, 낮에는 여기가 자기 작업실이라는 둥, 이야기가 길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그분은 자기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따뜻하게 먹어야 한다며 육전을 몇 번이나 나눠서 내주시는 사장님과 설거지하기 귀찮으니까 쓰던 잔에 다시 맥주를 주겠다는 사장님. 김치 하나에도 넘쳐나는 사장님의 자부심과 내가 원래는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설명하는 또다른 사장님의 자부심. 두 다른 사장님이 만들어내는 전혀 다른 두 가게의 분위기.

남편이 말했다.

“예전에 동파이프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어. 냉장고에 들어가는 가느다란 동파이프를 구부리는 일. 아주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잖아. 근데 이런 일을 하면서도 꼭 그런 분이 계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잘 돌릴 수 있을까를 연구하시는 분. 자기가 이렇게 저렇게 실험해보고,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거지. 그런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뭐 진급을 하는 것도 아니야. 근데도 그런 분들이 꼭 있어.”

그렇다.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누가 보기엔 정말 하찮은 일이라도 그 일에 기어이 영혼을 불어넣는 사람들. 허름한 일도 반짝반짝 윤기가 돌도록 만들어놓는 사람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자부심으로 빛나는 표정의 사람들. 그런 표정으로 자기 일을 하는 주변의 사람들.

물론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나에게도 너무 먼 경지다. 하지만 그 경지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까이해야 한다. 그 에너지가 나에게까지 전파되니까.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또 그 육전과 그 김치를 먹으러 가겠다는 이야기다. 조만간. 얼른. 어쩌면 오늘 당장. 아, 생각만으로도 벌써 침이 고인다.

김민철 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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