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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08 19:39 수정 : 2017.03.08 20:00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발견한 은행나무 잎. 김민철 제공

[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따뜻하고 예쁜 계절을 찾아 여행을 떠난 ‘겨울 마니아’의 묵상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발견한 은행나무 잎. 김민철 제공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고 묻는다면 한참을 망설이겠지만,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뭐냐고 묻는다면 단숨에 대답할 수 있다. 겨울. 그중에서도 콧속까지 쨍하게 얼어붙을 것 같은 투명한 추위의 겨울을 좋아한다. 최강 한파가 몰아닥쳤다는 뉴스를 봐도 나는 걱정이 없다. 코트를 입는 것도 좋아하고, 목도리를 하는 것도 좋아하고, 눈도 좋아하고, 빙판길에 넘어질까 종종걸음으로 걷는 것도 좋아하니까. 나는 정말로 겨울을 좋아하니까.

20대에는 나만의 방식으로 겨울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면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는 것.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그게 나의 겨울 연례행사였다. 보기만 해도 뼛속까지 시린 그 광경에 사람들은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 시선을 에너지 삼아 나는 더 당당하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 거리 저 거리를 헤집고 다녔다. 이제 더는 추운 겨울에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돌아다니는 만용은 부리지 않는다. 그러기엔 난 좀 늙어버렸으니까. 이도 좀 시리고, 추위도 좀 더 타는 것 같고. 어쨌거나 그런 짓을 하기엔 이제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 사랑이 지나쳤기 때문일까? 나는 2월말이 되면 종종 우울했다. 겨울이 끝나가다니.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겨울이 봄 때문에 물러가고 있다니. 봄기운이 스멀스멀. 나의 우울도 스멀스멀. 거기에 ‘햇빛 알레르기’까지 더해지면서 증상은 더 심각해졌다. 겨울 햇빛은 아무래도 괜찮았지만 봄이 시작되면, 그러니까 여름이 가까워지면 햇빛 알레르기도 심해졌기 때문이다. 햇빛을 조금 쬐기만 해도 바로 발진이 일어나면서 미친 듯이 가려운 증상. 의사 선생님이 단호하게 “치료법은 없어요”라고 말한, “햇빛을 보지 마세요”라는 처방을 내려준 알레르기. 그러니 봄은 나에게 고통의 시작을 의미했다.

어느 봄날이었다.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무심코 은행나무를 올려다봤다. 연무가 낀 것처럼 연하게 연둣빛이 감돈다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은행잎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신생아의 손이 저럴까. 꼬물꼬물 기지개를 켜듯 손톱보다 더 작은 은행잎이 앞다투어 가지 끝에서 나오는 풍경. 10년 넘게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처음 본 풍경이었다. 내가 신입사원 때부터 봄마다 은행나무는 저런 연한 연둣빛 손바닥을 펼쳤는데,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엇! 봄이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나. 봄이 이렇게 말랑말랑한 색깔이었던가. 내 머릿속은 분주했다. 겨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느라, 단 한 번도 봄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토록 봄이 아름다우니까 봄기운이 조금만 올라오면 음원 차트에 ‘벚꽃 엔딩’이 재진입하는 거겠지. 봄을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기 때문에 꽃샘추위 앞에서 사람들은 그토록 불행해하는 거겠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답지 않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나답지 않게 이런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래, 봄 여행을 가자. 때마침 봄꽃 뉴스가 흘러나왔다. 마치 일기예보처럼 각 지역별로 개화 시기를 알려준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봄기운은 이미 남쪽을 다 정복하고 빠르게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손톱보다 작고 연한 은행잎이
봄마다 손을 내미는 걸 몰랐다
겨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느라
한번도 봄을 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바쁜 회사일에는 눈을 질끈 감기로 했다. 휴가를 내겠다 말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고민을 하다가 지리산을 택했다. 남쪽이니까 꽃이 다 피었을 것이고, 산이니까 꽃이 지천일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계곡마다 진달래겠지. 이름 모를 꽃들이 바위틈마다 돋아나고 있겠지. 야심차게 지리산에 도착했으나 꽃은 없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다급한 마음에 나는 지리산 계곡 옆에서 막걸리 파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저, 여기 꽃구경하러 왔는데, 꽃이 하나도 안 피었네요?”

“꽃 보려면 하동 같은 섬진강 쪽으로 가야지. 여긴 고산지대잖아. 꽃이 제일 늦게 피지. 서울보다 늦게 필걸?”

아, 어리석은 도시인이여. 고도도 계산할 줄 모르는 도시인이여. 나는 그저 남쪽이면 다 똑같은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생애 처음 봄을 향한 여행은, 가장 익숙한 겨울을 향한 여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며 걷고 또 걸었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술을 마셨다. 밤새도록 뜨끈뜨끈했던 민박집 방바닥에 몸을 지지면서 그저 주인아주머니의 난방 인심에 감사해야 했다. 여행은 즐거웠지만, 원래의 목적을 생각하자면 완벽한 실패에 가까웠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지난주, 나는 다시 한번 봄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지난 여행의 과오를 떠올리며, 이번엔 완벽을 기했다. 통영. 가장 남쪽의 도시. 고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곳. 미리 확인해보니 기온도 서울보다 5도 이상 높았다. 앗싸, 이번엔 진짜 봄맞이 여행이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통영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봄이 지천에서 쏟아져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날씨도 좋았고, 햇살도 좋았고, 서울보다 따뜻하고 다 좋긴 한데, 그렇다고 그 날씨를 봄이라 우길 수는 없었다. 아차, 아직 2월이구나. 아, 나의 봄맞이 여행은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가는 건가.

같이 간 선배가 유독 꽃에 민감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배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킁킁거리며 “매화가 주변에 있나봐!”라고 말했고, 어김없이 매화꽃을 찾아냈다. 길을 걷다가 동백꽃을 찾아내는 것도 선배였다. “하얀색 동백이야!” “저기 조금 덜 핀 저 동백, 완전 예쁘지?” 봄은 구석구석에서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물론 그중 내게 가장 깊이 와닿은 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시장 할머니 좌판 위, 도다리와 쑥이 나란히 놓여 있는 풍경이었다. 예쁜 봄도 좋지만, 맛있는 봄이 난 더 좋으니까.

‘봄은 오지 않아요. 당신이 가는 거예요.’ 한 소풍용 도시락 카피라고 한다. 봄을 찾아 지리산에 갔고, 봄을 찾아 통영에 갔다. 그리고 봄을 찾아, 당연하게 오지 않는 바로 그 봄을 찾아 지난겨울 우리는 광화문에 갔다. 예쁜 봄도 좋고 맛있는 봄도 좋지만, 3월 중순에 올 그 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벌써부터 떨린다. 그 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김민철 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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