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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14 19:18 수정 : 2016.12.14 20:12

[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성선설·성악설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는 내게 ‘멘붕’을 선사한 사람들을 보며

만화영화 <똘이장군> 포스터. 인터넷 갈무리
성선설과 성악설. 모든 인간이 처음부터 선하게 태어났다는 생각과,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게 태어났다는 생각. 고등학교 때 윤리 교과서에서 그 두 단어를 보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뭐가 맞는 거지? 나는 뭐가 맞다고 생각하는 거지? 둘 중 하나를 꼭 골라야만 하는 거야?

물론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건 아니었다.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짬짜면이 태어난 것처럼, 윤리 교과서에도 짬짜면이 존재했다. 우유부단한 모든 인간들을 위한 학설, 바로 ‘성무성악설’이었다. 인간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태어나지 않았다는 짬짜면 같은 주장. 어쨌거나 그 세 가지 주장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면서 발표를 시키겠다 말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엄마의 피아노 학원에서 만난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피아노 수업이 끝나면 엄마는 그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라는 심부름을 내게 시켰다. 그때마다 나는 난감했다. 내게 손은 딱 두 개였고, 아이들은 앞다투어 내 손을 잡으려 아우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손은 늘 욕심이 많고 재빠른 아이들의 차지였다. 그 아이들은 잽싸게 내 손을 잡고, 내 몸에 자기 몸을 바싹 밀착시키고, 나만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보지 말고, 자기만 바라보라며 갖은 애교가 섞인 눈빛과 함께. 그 눈빛 어딘가에는 강아지의 꼬리가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여우의 꼬리 몇 개가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눈빛과 마주치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손잡고 싶은 아이들은 따로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싶다는 의사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아이들, 누군가를 밀쳐내 본 적 없는 조용한 아이들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때 누군가의 손은 잡고 싶었고, 누군가의 손은 잡고 싶지 않았다. 그래 봤자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 그 아이들이 착하면 얼마나 착하고, 나쁘면 얼마나 또 나빴겠는가? 하지만 그 나이의 아이들 중에서도 이미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는 나눌 수 있었다. 욕심이 많은 아이들은 나쁜 아이들, 조용한 아이들은 착한 아이들. 물론 어떤 객관성도 없는 순전히 나만의 기준이었지만.

생각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아주 어릴 때 병원에서의 기억에 도착했다. 지금의 듬직한 나의 몸을 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릴 땐 자주 아팠다고 한다. 기어 다니며 신발 밑창을 주야장천 빨았던 게 기억나고, 먹은 건 무조건 다 토했던 것도 기억나는 걸 보면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신발 밑창을 빨고 계속 토하는 아이가 튼튼할 리 없으니까.

악하게 태어난 게 아니라면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의심케 만드는 그들을 위해
가만히 나의 촛불을 들어보인다

어쨌거나 소아과의 기억에서 유독 생생한 것은 빨간 빨래 바구니 같은 아기용 체중계도 아니고, 주사를 맞았던 기억도 아니고, 분홍색 물약을 먹기 싫다고 울었던 기억도 아니다. 뜬금없지만 그 병원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만화영화 <똘이장군>이었다.

의사 선생님에게 입안도 보여주고, 상의를 바짝 들어 심장 소리도 들려주고, 엉덩이까지 까 주사까지 맞고 나오는 길에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병원 한쪽 구석에 앉아 <똘이장군>을 보고 있는 의사 선생님의 아들 옆에 앉았다. 그러곤 바로 그 만화에 빠져들었다. 그때는 그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만화인지도 몰랐고, ‘반공영화’라는 말조차도 몰랐으니까.

물론 실제 그 만화영화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모든 만화영화가 그렇듯이 착한 놈과 나쁜 놈이 선명하게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얼굴만 봐도 차이는 확연했다. 우리 편은 순한 얼굴, 저쪽 편은 험악한 얼굴. 목소리도 우리 편은 또랑또랑, 저쪽 편은 쩌렁쩌렁. 우리 편은 원래부터 착한 놈, 저쪽 편은 천성적으로 나쁜 놈.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때마침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김민철, 말해봐.”

“제 생각에는요, 어떤 사람은 착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나쁘게 태어나는 것 같아요.”

“오. 이건 책에도 안 나오는 완전히 새로운 사상인데? 뭐라 불러야 되는 거지?”

“그거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는 언제나 세상을 착한 편과 나쁜 편으로 나누었다. 책을 읽을 때에도, 영화를 볼 때에도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는 일이 아니라, 나쁜 놈인지 착한 놈인지 판단하는 일이었다. 책을 몇 장 읽지 않고서도, 나쁜 사람이라 단정을 내려버리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부터 말까지 다 삐딱하게 읽기 시작했다.

심지어 영화 <미션 임파서블>을 보다가는 중간에 극장에서 나와버렸다. 톰 크루즈가 분명 착한 놈 같았는데, 어느 순간 나쁜 놈 같았고, 그러더니 또 착한 놈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도무지 헷갈려서 영화 자체에 전혀 집중을 못한 것이다. 그 단순한 영화 하나도 나에겐 어려운 텍스트가 되어버렸다. 세상을 억지로 둘로 나누려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흑백으로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당장 누군가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착한 사람인가요, 나쁜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나 자신이 어떤지도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어떤 사람에게는 착한 사람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일 테니까. 어떤 순간에 나는 지극히 순하지만, 어떤 순간에 나는 지독히도 악하니까. 나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던 착한 얼굴을 꺼내는 날이 있을 것이고, 나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던 표독스러운 고함을 토해 놓는 날도 있을 테니까.

나라는 인간 하나만 놓고 봐도 어느 정도는 착하고 어느 정도는 순진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비겁하고, 어느 정도는 구질구질하고, 어느 정도는 고상하고, 어느 정도는 단호하고, 어느 정도는 비열하고,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나’라는 인간 하나를 겨우 만드는데, 어떻게 착한 사람 혹은 나쁜 사람으로 세상을 반으로 나누려고 했던 것인가. 어떻게 누군가는 태어났을 때부터 선하고, 누군가는 태어났을 때부터 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이 깨달음 이후 나는 수년간 나의 성선설과 성악설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 노력은 자꾸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수많은 얼굴들과 수많은 문건들과 수많은 말들을 보며 ‘절대악’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 게 아니고서야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드라큘라가 빛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절대악’들도 촛불의 빛은 무서워하고 있었다. 확실한 건 선함이 악함을 이긴다는 것,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번 주말에도 나는 가만히 나의 촛불을 준비하는 것이다.

김민철 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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