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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16 19:22 수정 : 2016.11.16 20:14

[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거울 360개를 가진 나 vs 거울이 없거나 왜곡된 것만 가진 당신들

애니메이션 <카이:거울 호수의 전설>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엄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를 마치면 나는 자동으로 엄마 학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아무리 늦은 밤이어도, 누군가는 꼭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곳에 있었던 수많은 나의 시간만큼이나 기억나는 학생들도 많은데, 그중 유독 ‘거울’로 기억되는 친구가 있다.

나와 동갑내기였던 그 친구는 음대 지망생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늘 손거울을 악보 옆에 두고 피아노를 쳤다. 연습 한 번에 거울 한 번, 이런 패턴이었다. 체구가 작고 오밀조밀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그 손바닥만한 얼굴에 뭘 그렇게 볼 게 있다고 그 친구는 한 곡 마칠 때마다 거울의 의례를 빠트리지 않았다. 실기시험 날짜가 아무리 코앞에 닥쳐도 거울의 의례는 경건하게 치러졌다. 오죽하면 대학교에 붙고 난 뒤의 소원이 실컷 거울을 보는 것이었다. 그 소박한 소원은 귀여운 그 친구와 딱 어울렸다. 물론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는 소원이었지만.

그렇다. 그때에도, 그 전에도, 그 아주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봐도, 나는 거울 보는 걸 좋아한 적이 없다. 물론, 지금도 거울 보는 건 매우 어색하다.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변하지 않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기계적으로 화장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거울과 멀리 지낸다. 물론 가방에 거울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셀카를 찍는 일도 없다.

그렇게나 얼굴이 마음에 안 드나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나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싶다. 외모에 무슨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거울을 보며 외모에 신경 쓰는 것 자체가 겸연쩍다. 겸연쩍어서 겸연쩍다고 말하는 건데 왜 겸연쩍냐고 묻는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다. 다만 최근 한 웹툰에서 본 대사로 거울에 대한 내 마음을 압축적으로 드러낼 수는 있을 것 같다. “멋내는 걸 들켜버리다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

사람마다 각자의 거울이 있다는
믿음 또는 환상은
‘이 와중에’ 웃는 대통령을 보며
와장창 깨져버렸다

가방에 거울 하나 안 들고 다니는 것과는 별개로, 나에겐 성능 좋은 거울이 하나 있다. 하나가 아니라 100개. 100개가 아니라 360개. 너무 성능이 좋아 골치 아픈 거울들이다. 물론 가상의 거울이지만. 이 가상의 거울은 나를 24시간, 360도로 감시하며 ‘그건 네가 잘못했어’, ‘그렇게 바보 같은 대답을 해버리다니, 실망이군’, ‘그딴 걸 농담이라 던진 거냐’, ‘또…또!! 감정적으로 대처해버렸어!’ 등의 논평을 내놓는다. 이놈의 거울 때문에 짝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했고, 이놈의 거울 때문에 남들이 다 흥에 겨울 때도 혼자 정색하고 앉아 있고, 이놈의 거울 때문에 나는 그만 지루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학생 때의 일이다. 친구들은 모두 술을 마시고 취해 나자빠지는데, 나는 취하지도 못했다. 이놈의 거울이 나를 끝없이 감시하고 있어서. 사람들 앞에서 망가진다는 걸 상상만 해도 머리 꼭대기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궁금했다. 나는 도대체 취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얼마나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혹은 그냥 잠들어버리는지. 혹은 갑자기 과장된 진심을 내뱉는지. 거울이 사라진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궁금했다. 확실한 건 음주에 관한 한 나는 엄마의 딸이 아니라 아빠의 딸이었다. 엄마는 맥주 한 모금에도 옆으로 쓰러져버리니까. 아빠의 피를 믿고,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제일 친한 선배와 제일 친한 친구와 나. 셋이서 학교 앞 도로변 벤치에 모였다. 소주 한 병을 들고. 왜 그곳을 택한 건지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어쨌거나 모였고, 나는 술을 마셨다. 나만. 그 자리는 명백히 나의 음주력을 시험하는 자리였기에. 나만 술을 마셨다. 소주 한 병. 원샷. 선배와 친구는 박수를 쳐줬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관찰. 그 순간 나의 거울도 일을 하기 시작했다. ‘네가 어떻게 변하는지 한번 보자.’ 하지만 거울은 또 너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너 정말 그렇게 망가질 자신 있어? 망가진 모습을 여기 이 사람들에게, 보여줄 자신이 있어?’

나는 벌떡 일어났다. 가방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90도로 인사를 꾸벅했다. “저는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러고는 바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자취방을 향해 미치도록 뛰었다. 내가 확 취해버리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만 했다. 길에서 추태를 보일 순 없었다. 다다다다 뛰어서 집 앞에 도착했다. 다다다다다다다다 뛰어서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나의 옥탑방이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곧바로 잠들었다. 그렇다. 나의 거울 없애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운명의 데스티니’ 같은 것이니까. 많거나 적거나 사람들에겐 가상의 거울이 있고, 나에겐 그냥 좀더 많은 거울이 있을 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개수는 다르겠지만, 각자에겐 각자의 거울이 있다는 믿음 혹은 환상.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이상한 짓을 하거나 이상한 말을 내뱉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버릇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돌아보면 정말 부끄러울 텐데….’

회사를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거울에 대한 믿음은 조금씩 금 가기 시작했다. 거울이 아예 없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도 뒤돌아서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볼 거라고 믿으려 노력했다. 거울이 없다는 건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믿음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와장창 깨져버린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 와중에도 웃을 수 있는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의 얼굴을 보면서. 금방 거짓으로 탄로날 사과를 하면서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까도 까도 또 나오는 수많은 비리들을 보면서. 치졸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수많은 행적들을 보면서. 그걸 또 비호한답시고 말인지 똥인지 뭔지를 지껄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러니까 자신을 비춰주는 똑바로 된 거울이 없거나, 혹은 아주 왜곡된 거울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꾸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저기요, 거울 하나 빌려드릴까요?”

근데 아무래도 그 인간들은 내 거울을 안 빌려갈 것만 같다. 어쩔 수 없다. 우리가 그들에게 거울이 되어줄 수밖에. 수고스럽더라도. 화가 나더라도. 내가 이러려고 국민이 됐나 자괴감이 들더라도.

김민철 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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