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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06 14:59 수정 : 2017.02.06 20:52

영화 <컨택트> 유니버셜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권여선의 인간 발견]

영화 <컨택트> 유니버셜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영화 <컨택트>에서 언어학자 루이스는 갑자기 지구에 출현한 외계 생물체와 의사소통을 하여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알아내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루이스는 언어학적 호기심에서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그 임무를 받아들인다. 그로 인해 그의 운명이 바뀌었는지 아닌지는 간단히 말할 수 없다. 낱낱이는 바뀐 게 없는데 통째로는 바뀌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루이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도 언제나 똑같지만 생판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다리가 일곱이라 ‘헵타포드(칠지류)’라 불리게 된 외계 생물체의 문자언어는 인류의 그것과 다르게 구조화되어 있다. 인류의 언어가 시간 순으로 의미의 ‘선(線)’을 따라 기록된다면 헵타포드의 언어는 한순간에 의미의 무늬가 결합된 ‘면(面)’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는 이런 언어학적 차이가 어떻게 인식론적 차이와 필연적으로 연관되는지가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영리하게도 그런 복잡한 문제보다는 헵타포드가 한 다리를 들어 올려 찰나적으로 먹물을 분사하여 만들어내는 외계 문자의 매혹적인 그래픽 이미지에 집중한다. 그것은 마치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는 과정을 한 순간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문장을 통째로 흩뿌리는 헵타포드식 문자에는 당연히 선후가 없고 시간적 연속성이 없다. 시간에 대한 그들의 인식 또한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흐름을 초월하여 시간의 판 전체를 찰나에 훅 일별하는 식이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학습하면서 루이스의 인식도 변한다. 루이스는 환각처럼 현재 속에 흩뿌려진 미래를 보게 되고 마침내 자신이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게 될 운명임을 알게 된다. 루이스의 선택은 기꺼이 그 삶을 받아 안는 것이다. 변한 건 없지만 전체가 변했다. 루이스는 매 순간순간 최고의 충만함으로 살아가게 된다(또는 될 것이다). 운명은 운명의 일을 하고 루이스는 루이스의 삶을 산다. 이로써 소중한 존재를 상실하는 비극적 운명과 소중한 존재를 사랑하는 기쁨의 삶은 양립한다. 그게 루이스가 운명과 벌이는 ‘논-제로섬(non zero-sum) 게임’이다. 아무도 지는 사람이 없고, 결과가 무로 돌아가지 않는.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드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수많은 루이스들을 본다. 소중한 존재를 잃는다는 것은 이미 그런 존재를 가졌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미리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그걸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설사 우리의 미래가 또다시 고통과 실패로 점철될 것을 안다 해도, 우리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똑같은 절박함과 분노로, 조금도 식지 않은 희망과 열정으로 촛불을 켤 것이다. 어떤 끔찍한 결과도 주말마다 전국에 켜진 수백만의 촛불 속에 찬란하게 흩뿌려진 미래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그 무엇도 헵타포드 문자보다 아름다운 이 거대한 희망의 문자를 무로 돌릴 수는 없다. 역사는 역사의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다. 그게 우리가 역사와 벌이는 ‘논-제로섬 게임’이다.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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