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2.26 13:54
수정 : 2016.12.26 19:27
[권여선의 인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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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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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은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목수이다. 깐깐하고 입바른 소리 잘 하고 정이 많은, 흔히 볼 수 있는 착한 아버지의 전형이지만 그에겐 자식이 없고 정신질환을 앓던 아내는 죽었으며 그 또한 심장질환으로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는 질병으로 인한 실업수당이 지급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그가 연필을 귓바퀴에 꽂고 라디오를 들으며 홀로 나무를 깎는 장면은 평화롭지 않다.
문제는 심장인데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한 그에게 복지재단 직원은 구직수당을 신청하라고 한다. 컴맹인 그가 천신만고 끝에 구직수당을 신청하자 구직활동을 위해 이력서 작성 수업을 들으라고 하고, 다음엔 이력서를 들고 구직활동을 하라고 하고, 다음엔 구직활동을 증명하는 내용이 부족하니 더 열심히 하라고 한다. 일을 할 수 없는 다니엘이 열심히 구직활동을 하러 다니고 그를 채용하려는 고용주에게 일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한 후 욕을 먹어야 하는 상황은 가히 죄 없음이 유죄의 이유가 되는 카프카적 세계와 닮았다.
이 부조리는 다니엘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이사를 와서 길을 몰라 상담에 조금 늦은 싱글맘 케이티에게 직원은 가차 없이 지원금 중단을 통보한다. 이에 분개한 다니엘이 항의하다 사무실에서 쫓겨나는 사건을 계기로 둘은 친해진다.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케이티의 상황은 훨씬 가혹하다. 그래서 다니엘이 그들 집의 변기를 고쳐주고 문손잡이를 고쳐달고 나무물고기 모빌을 달아주고 양초와 화분을 이용해 조그만 난로를 만들어주는 장면은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다.
실화 여부를 떠나, 케이티가 식료품 배급소에서 직원이 안 보는 틈에 통조림을 따 허겁지겁 먹다 국물을 흘리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관객 중 누군가는 깊이 공감할 것이고 누군가는 과장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감동했든 불편했든, 이 장면이 스크린을 푹 뚫고 나와 우리 앞에 당혹스럽게 현존하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당혹스럽다는 것, 사람은 이 감정과 함께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정치신학자 야콥 타우베스는 말했다. “믿고 싶은 대로 텍스트를 조작하지 않는 바에야.” 켄 로치 감독은 ‘텍스트’를 ‘현실’로 바꾸어 우리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영화에 대한 열광은 웰메이드 작품에 대한 ‘공예적 도취’와 상관이 없고, 슬픔이나 연민, 정의감이나 분노와도 거리가 있다. 그건 어쩌면 영화 속 부조리한 현실의 파편들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이 너무도 묵직하고 통렬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경직된 대응만 되풀이하는 로봇 같은 직원들을 거느린 복지시스템의 냉혹함과, 복지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가 아니고 시민이라고 절규해야 하는 참혹함이 공존하는, 이것이 21세기 영국의 현실이며 한국의 미래이다. 우리는 ‘블레이크 경’의 죽음 앞에서 오래 당혹스럽고 불편해야 하리라. 믿고 싶은 대로 현실을 조작하지 않는 바에야.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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