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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3 21:43 수정 : 2020.01.14 02:37

명인(命人) ㅣ <회사를 해고하다> 저자

사람이 계속해서 특권을 누리고 살다 보면 자기가 누리고 사는 것이 특권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쉽게 잊는 것처럼. 대도시나 수도권 지역에 살지 않는 사람은 하루나 이틀 전에 길을 나서야 간신히 약속 장소에 시간 맞춰 도착하는 경우가 많고, 장애인들에게 그것은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어떠한가.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취임사로 국민의 가슴을 울렸던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부와 권력을 쌓아왔고, 심지어 그것을 대물림하기 위해 어떤 짓을 저질러왔는지를 우리는 지난 한 해 지겹도록 보았다. 그러나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사람들, 그런 건 ‘일반적인’ 관례일 뿐인데 왜 문제가 되냐는 사람들, 똥 묻은 자들은 겨 묻은 자들을 나무라고, 겨 묻은 자들은 똥 묻은 자들도 있는데 내가 왜 더럽냐며 순교자 행세를 한다. 보수를 표방하든 진보를 앞세우든 진영 논리에 따라 편들고 있는 걸 보면 염치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기야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대형 승용차로 인사를 대신하고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를 덕담인 양하는 광고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지 않은가? 이제 정말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굴려가는 것일까?

얼마 전 전남에서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하는 강사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강사가 물었다. “명인 샘, ○○ 샘이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평소엔 의식하지 못했는데 지목받은 강사를 유심히 살피니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어? ○○ 샘, 그러고 보니 액세서리를 하나도 안 했네?” 그 강사는 평소 원색 옷도 즐겨 입고 반지며 목걸이며 귀걸이며, 액세서리를 즐겨 하고 다녔던 분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분의 몸에서 화려한 액세서리가 사라진 것이다. 듣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한 특성화고에 수업을 하러 갔더란다. 그날은 유난히 생계형 알바 노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단다. 그런데 쉬는 시간, 그중 한 학생이 교탁 앞으로 다가와서 부러운 얼굴로 강사가 하고 간 액세서리를 가리키며 묻더란다. “샘, 이거 진짜예요?” 샘은 갑자기 낯이 뜨거워지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어지더라고. 내가 물었다.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기껏해야 18금 정도의 액세서리를 달고 가 놓고 뭘 또 쥐구멍까지 찾았어요?” 그 강사는 말했다. “제가 만나는 학생들 중엔 죽어라고 알바를 해도 최저 시급이나 받잖아요. 그것도 죄다 집안 생활비에 보태는 학생들도 많고요. 저한텐 기껏해야 18금이라도 그게 누군가한텐 상처나 부러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 못 했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노동인권수업 중이었다. 우리가 먹는 급식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노동을 하는지를 마인드맵으로 찾는 시간이었다. 이 활동을 마칠 무렵 한 학생이 말했다. “샘, 기분이 좀 이상해요. 양아치가 된 기분이에요.” 나는 깜짝 놀라 왜냐고 물었다. “제가 한 끼 먹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미안한 것 같고, 이런 것도 모르고 밥을 먹은 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요.” 다른 모둠도 모두 활동이 끝나고 학생들이 소감을 적어 냈다. 그런데 조금 전에 그렇게 말했던 학생의 소감이 바뀌어 있었다. “왕이 된 기분.” 나는 왜 아까와는 생각이 달라졌냐고 물었다. 학생이 대답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밥을 먹으면 양아치인 것 같고요. 이제 그 고마움을 알고 먹을 수 있으니 우린 모두 왕이 된 기분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울에서 일하던 사람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 국내 주요 언론들이 아무 성찰 없이 ‘좌천’이라고 쓰는 시대. 남도의 끝, 군 단위에 사는 내 주변에는 아직 남보다 더 가진 것을 미안해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들, 남의 노동에 빚지고 사는 일을 고마워할 줄 아는 보통사람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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