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고흥엔 워낙 전셋집이 귀하다보니 집을 짓는 동안 읍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살면서 보니 고흥 읍내는, 불과 1~2년 사이에 우리가 처음 이사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자고 깨면 아파트가 늘어나고, 차는 체감으론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듯. 고흥 인구는 점점 준다는데 읍내는 날마다 장날만 같으니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몰려왔나 싶다. 이제는 군 단위에 살아도 사람들은 시골보다는 읍내를, 단독주택보다는 아파트를 선호한다고.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 때문이란다. 가장 큰 이유가 교육 때문이라니 나는 공연히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그래서 떠오른, 내가 어릴 때 자라던 생각. 변두리였지만 서울이었고, 부자 동네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달동네처럼 특별히 가난한 동네도 아니었다. 우리 동네엔 따닥따닥 붙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오만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당시엔 흔하지 않았던 기름보일러 집, 연탄보일러 집, 아궁이에 연탄을 때는 집이 섞여 있었다. 2층 양옥에 한 가구가 사는 집도 있었고, 단층 한옥에 서너 가구가 사는 집도 있었다. 집주인도 있었고, 셋방살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 한집에 살았다. 양변기가 놓인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집이 있었는가 하면, 나는 등굣길마다 골목길 끝에 있는 공동 화장실, 이른바 마을 변소에 줄이 늘어서 있는 걸 보면서 다녔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는 집도 꽤 있었단 얘기다. 그렇게 다른 집에 사는 아이들이 대개 학교를 마치면 너나 할 것 없이 집에 가방만 집어 던져두고 골목길로 뛰쳐나왔다. 다방구, 돈까스, 치기 장난,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같은 걸 하면서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면, 어느 집에서 먼저랄 것도 없이 “밥부터 먹고 놀아라”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아이들은 하나둘씩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놀던 골목길엔 가끔씩 술에 취해 누구에겐지도 모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저씨가 있었고, 가끔은 뇌전증으로 발작을 일으켜 버둥거리는 이웃집 오빠도 있었다. 날마다 학교에서 손을 잡고 같이 오던 내 짝꿍은 지적장애인이었고, 가수보다 춤을 잘 췄던 내 친구의 엄마는 술집을 했다. 그때라고 사람들의 편견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어른들에게 들은 대로 그런 친구들을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놀림당하는 친구의 편을 들어 같이 싸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동네에서 유명한 술주정뱅이 아빠를 데리러 나오는 친구가 나를 보고 마음이 상할까봐 나는 안타까워서 계속 보고 있었으면서도 알은 체를 하지 못했고, 이웃집 오빠가 쓰러지면 나는 부리나케 뛰어서 오빠네 식구들을 부르러 가곤 했다. 나는 그렇게, 저마다 처지가 다른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뛰어놀거나 친구 집을 오가며 우리만의 비밀을 나누며 자랐다. 나는 이제 그 동네를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언젠가 일이 있어 갔더니 골목길에 창을 내고 살던 그 많은 집들이 없어지고 아파트촌이 되었더라. 동전을 모아 군것질거리를 사던 가겟방 대신에 들어섰던 슈퍼마켓마저 사라지고 대형마트가 우뚝 서 있었다. 내가 살던 옛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침마다 공동화장실 앞에 줄을 섰던 그 골목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추억담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무분별한 개발은 가난한 사람들을 점점 더 외곽으로 밀어냈고, 그나마 도시에도 남아 있던 자연을 파괴했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부자인, 가난한, 장애아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부모를 둔, 시시때때로 발작을 일으키는 오빠를 둔, 공부를 잘하는, 혹은 그렇지 않은 그 모든 아이들과 친구였던 그 어린 날이 없이도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울 수 있을까? 조금 더 큰 도시로, 그도 안 되면 읍내로, 중앙으로 중앙으로만 향하는 우리의 욕망은 더불어 사는 사람의 ‘사이’도 부숴버린 게 아닐까? 우린 이제 그 ‘사이’를 어디에서 배울까?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골목길에 창을 내고 살며 / 명인(命人)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고흥엔 워낙 전셋집이 귀하다보니 집을 짓는 동안 읍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살면서 보니 고흥 읍내는, 불과 1~2년 사이에 우리가 처음 이사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자고 깨면 아파트가 늘어나고, 차는 체감으론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듯. 고흥 인구는 점점 준다는데 읍내는 날마다 장날만 같으니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몰려왔나 싶다. 이제는 군 단위에 살아도 사람들은 시골보다는 읍내를, 단독주택보다는 아파트를 선호한다고.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 때문이란다. 가장 큰 이유가 교육 때문이라니 나는 공연히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그래서 떠오른, 내가 어릴 때 자라던 생각. 변두리였지만 서울이었고, 부자 동네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달동네처럼 특별히 가난한 동네도 아니었다. 우리 동네엔 따닥따닥 붙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오만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당시엔 흔하지 않았던 기름보일러 집, 연탄보일러 집, 아궁이에 연탄을 때는 집이 섞여 있었다. 2층 양옥에 한 가구가 사는 집도 있었고, 단층 한옥에 서너 가구가 사는 집도 있었다. 집주인도 있었고, 셋방살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 한집에 살았다. 양변기가 놓인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집이 있었는가 하면, 나는 등굣길마다 골목길 끝에 있는 공동 화장실, 이른바 마을 변소에 줄이 늘어서 있는 걸 보면서 다녔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는 집도 꽤 있었단 얘기다. 그렇게 다른 집에 사는 아이들이 대개 학교를 마치면 너나 할 것 없이 집에 가방만 집어 던져두고 골목길로 뛰쳐나왔다. 다방구, 돈까스, 치기 장난,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같은 걸 하면서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면, 어느 집에서 먼저랄 것도 없이 “밥부터 먹고 놀아라”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아이들은 하나둘씩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놀던 골목길엔 가끔씩 술에 취해 누구에겐지도 모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저씨가 있었고, 가끔은 뇌전증으로 발작을 일으켜 버둥거리는 이웃집 오빠도 있었다. 날마다 학교에서 손을 잡고 같이 오던 내 짝꿍은 지적장애인이었고, 가수보다 춤을 잘 췄던 내 친구의 엄마는 술집을 했다. 그때라고 사람들의 편견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어른들에게 들은 대로 그런 친구들을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놀림당하는 친구의 편을 들어 같이 싸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동네에서 유명한 술주정뱅이 아빠를 데리러 나오는 친구가 나를 보고 마음이 상할까봐 나는 안타까워서 계속 보고 있었으면서도 알은 체를 하지 못했고, 이웃집 오빠가 쓰러지면 나는 부리나케 뛰어서 오빠네 식구들을 부르러 가곤 했다. 나는 그렇게, 저마다 처지가 다른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뛰어놀거나 친구 집을 오가며 우리만의 비밀을 나누며 자랐다. 나는 이제 그 동네를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언젠가 일이 있어 갔더니 골목길에 창을 내고 살던 그 많은 집들이 없어지고 아파트촌이 되었더라. 동전을 모아 군것질거리를 사던 가겟방 대신에 들어섰던 슈퍼마켓마저 사라지고 대형마트가 우뚝 서 있었다. 내가 살던 옛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침마다 공동화장실 앞에 줄을 섰던 그 골목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추억담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무분별한 개발은 가난한 사람들을 점점 더 외곽으로 밀어냈고, 그나마 도시에도 남아 있던 자연을 파괴했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부자인, 가난한, 장애아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부모를 둔, 시시때때로 발작을 일으키는 오빠를 둔, 공부를 잘하는, 혹은 그렇지 않은 그 모든 아이들과 친구였던 그 어린 날이 없이도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울 수 있을까? 조금 더 큰 도시로, 그도 안 되면 읍내로, 중앙으로 중앙으로만 향하는 우리의 욕망은 더불어 사는 사람의 ‘사이’도 부숴버린 게 아닐까? 우린 이제 그 ‘사이’를 어디에서 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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